싸움이 아니라 희망을 보고 싶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구호가 ‘공정과 상식’이었다. 언제나 듣기 좋은 말이라 선거 전략상 정했다 해도, 이제는 대통령 당선인의 책임감으로 공정과 상식을 근본 원칙으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기미는 도통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원내 제1당이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쪽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양쪽 모두 자기가 하는 것은 공정과 상식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다음은 국민 통합을 약속한 윤 당선인이 마음에 새겨둘 만한 말이다. “통합의 길을 약화시키는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중요한 단어들의 의미를 공허하게 하거나 변질시키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모든 형제들>).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공허한 말이 돼버렸다. 통합에 꼭 필요한 ‘공정’이 오염되면 권력의 자의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지배 도구로 변질된다. 다행히 상식은 쉽게 공허해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상식인지 아닌지는 사람의 ‘공통 감각’(common sense)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상식은 공정의 잣대다. 공정하다고 아무리 우겨도 상식에 맞지 않는 건 공정하지도 않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윤 당선인이 집무실 이전을 장애물 돌파하듯 밀어붙인 것은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광화문이든 용산이든 이전 절차는 대통령 취임 후에 시작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하루도 안 된다며 다짜고짜 국방부 건물을 비우라고 요구하는 당선인은 오만한 점령군 지휘관 같았다. 여론도 좋지 않았지만, 본인의 신념과 철학이라며 이전 계획을 강행하여 제왕적 대통령을 탈피하는 과정에서 ‘제왕’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것도 대통령이 아닌 당선인의 신분으로. ‘소탈한’ 제왕의 본질은 여전히 제왕에 있다.

상식 맞지 않는 건 공정하지 않아

민주당이 ‘검수완박’ 카드를 다시 꺼냈다. 명분은 검찰개혁 완수지만 실제는 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 방지용인 듯하다. 새 정부 출범 전에 법안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만, 민주당은 속도보다 중요한 시기를 놓쳤다. 시기가 명분을 좌우한다. 그토록 중요한 걸 지난 5년간 뭘 하다가 이제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는가? 지난 검경 수사권 분리 땐 왜 마무리하지 못했나? 과거 행적을 볼 때, 경찰은 권력에서 자유로운가? 경찰의 수사 역량은 충분한가? 현 정권에서 시급히 마무리할 사안이 그것밖에 없나? 정치개혁은? 차별금지는?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된다. 검찰개혁에 동조하는 정당과 시민도 민주당의 꼼수에 등을 돌린다. 그리고 꼼수는 상대의 꼼수를 부르고 정당화한다.

검찰은 민주당의 수사권 완전 분리 추진에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검사도 국가 공무원인 걸 생각하면 검찰의 집단행동은 특권 의식의 반영일 뿐이다. 아니라면, 윤 당선인이 폐지하겠다는 여성가족부 공무원들은 당장 항의 농성에 돌입해야겠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검찰은 “법과 상식에 맞게 나쁜 놈들 잘 잡으면 된다”고 했다. 물론 검찰이 그동안 나쁜 놈들도 많이 잡았겠지만 누가 나쁜 놈인지를 “법과 상식”이 아니라 권력의 입맛에 따라 판단했다는 비판에는 귀를 막는다. 반성할 줄 모르고 칼만 휘두르려는 검찰이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다만 개혁을 적절히 주도했어야 할 민주당의 무능과 태만이 안타깝다.

윤 당선인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늘 죄송했다”며 “명예가 회복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적으로 만나서 인간적으로 미안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 당선인으로 할 말은 결코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죄송하고 무슨 명예를 어떻게 회복시킨단 말인가? 국정농단 재판의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건가? 당시 특검 수사팀장이었던 본인이 잘못했다는 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지방선거가 코앞이라도 이건 자기를 부정하고 탄핵을 끌어낸 촛불시민을 모욕하는 발언이다.

깊고 넓게 보면 공정과 상식 수반

윤 당선인이 법무부 장관에 자신의 최측근을 지명했다. 후보자의 ‘영어 실력’과 상관없이, 이건 상식을 무시한 인사다. 정치보복의 불안에 검찰개혁 카드를 꺼내든 민주당에 ‘한번 해보자’는 선전포고였고 덕분에 민주당은 강행할 명분을 좀 더 챙겼다. 이러면 국민 통합이나 야당과의 협치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설마 이걸 의도했다고 믿고 싶진 않다.

민주당이 다수당이라도 지금은 대선 승자에게 힘이 있다. 힘센 쪽이 양보하는 게 상식이다. 그럴 때 공정 시비도 잦아든다. 민주당은 곧 야당이 되지만 여전히 압도적 원내 다수당이다. ‘살라미’ 전술 같은 꼼수 대신 깊고 넓게 멀리 보면서 ‘민주’당으로 움직이면 공정과 상식은 절로 따라온다. 박수는 덤이다. 이렇게 하면 서로 싸우는 것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희망의 과정이 되지 않을까. 희망은 그렇게 생겨난다. 새 정부 출범 때는 싸움이 아니라 희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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