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저 나무에 핀 꽃들을 따라가시오. 꼭 나무에 핀 꽃들만 따라가야 해요. 꽃들이 다 지면 아마 원하는 곳에 다다르게 될 거요.”1)

동백에서 목련으로, 활짝 꽃 핀 산벚나무에 이르기까지 봄은 달리고 또 달린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할머니는 볕 좋은 툇마루에 마늘 몇 톨이 담긴 양푼을 내려놓는다.

손 심심한데 이거나 까면서 얘기하자고. 내 이름? 그건 알아 뭐하게. 여자들 이름이야 온순하게 살라고 순이, 깨끗하게 살라고 숙이, 어쩌다가 꽃부리 영자를 써서 영이 그런 거지. 우리 때는 섭섭이나 언년이 아니면 다행이었지. 세상이 달라져서 제일 좋은 건 집 안에서 물 나오는 거, 전기밥솥이 밥해주는 거, 세탁기가 빨래 돌려주는 거지. 겨울마다 새벽에 물 길으러 가는 길이 고역이었지. 고무장갑 같은 게 있나, 찬물에 걸레를 빨면 손이 시퍼렇게 얼었어. 그러다가 동백이 피기 시작하면, 내가 왜 여기에 붙박여 있나, 보따리 싸서 서울 갈까, 그랬어. 열서너 살 때부터 동무들이 죄다 가버리니 거기가 좋은 곳인 줄 알았지. 지금은 안 좋냐고? 몰라, 가봤어야 알지. 저기 봐봐. 문풍지에 꽃잎들, 채송화, 제비꽃, 코스모스, 행운의 네 잎 클로버. 내가 말려서 붙여놓은 거야. 물지게 안 져도 되면서부터 만들기 시작했어. 동백? 시뻘건 거 안 예뻐. 마음만 아려. 분홍, 보라, 노랑 그런 게 이쁘지.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할머니와 달리, 철원에 살던 이모는 의정부에서, 용인에서, 서울에서, 인천에서 종종 발견되었다. 이모는 결혼했으나 언제부터인가 남편과 함께 살지 않았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첫차를 타고 나가 청량리의 어느 파출소에서 앉아 있던 이모를 데려온 엄마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언니는 왜 다른 건 다 잊었으면서 우리 집 전화번호만 기억하고 있는 거야.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거야. 마당 한구석에 우두커니 선 이모는 어깨가 좁고 가냘팠다. 아이를 낳지 않아 날렵한 몸이라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어린 나무 같은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나. 홀로 거리를 헤매던 이모나 고모들은 목소리도 없이 문득 사라지고 만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어느 봄날 막다른 골목에 서서 담장 너머로 함박 울음 같은 꽃잎을 후드득 떨구는 목련을 바라보고 있을까.

“여자들이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의 사라질 지경이라는 이유로 칭찬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

너는 늘 달리려고 했지.

그러는 넌 그 자리에 서 있으려고만 했어.3) 어두운 골목에서, 대낮의 거리에서까지 누군가가 너무 가까이 다가올 때 몸이 굳어지는 두려움을 너는 아니? 너무 눈에 띄어서는 안 되고 너무 보이지 않아도 안 된다는 걸,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고, 나 자신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늘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는 움츠림을 너는 아니? 언젠가는 영화에서, 시에서, 소설에서 심지어 팝송 가사에서처럼, 이제는 디지털 세상에서조차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상상을 너는 아니?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영원히 반복되는 소멸을 너는 아니? 누군가는 우리의 고통을 즐기고 있다는 두려움, 그 속에 갇혀 정신이 혼미해진 채 세상이 온통 함정과 지뢰밭처럼 느껴지는 황폐함을 너는 아니?

돌아오지 않는 응답을 기다리며 달린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뒷걸음치지 않기 위해 달린다. 우리는 꽃이 아니다. 불꽃이다.

멀리서 달려온 봄이 산벚나무에 도착한다. 연분홍 벚꽃이 연두의 새잎과 함께 하나둘 피어난다. 꽃그늘이 환하다. 고개를 들어보면, 꽃은 그저 꽃이 아니다. 잎이, 가지가, 줄기와 뿌리가 모두 나무인 것처럼, 꽃은 나무다. 겨울을 통과한 나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살아가야 한다는 열망이다.

1)<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2), 3)<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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