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칼잡이 검사의 시대

정제혁 사회부장

검찰개혁은 노무현 정부 이래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였다. 그 흐름은 검찰권 분산으로 수렴하는데, 박병석 국회의장이 지난 22일 중재안으로 제시한 ‘검찰수사권 단계적 폐지’에 여야가 합의하면서 마침표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과거 검찰은 수사권, 수사지휘권, 기소권을 모두 가졌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수사할 수 있었다. 지휘권자의 위치에서 경찰 수사의 개시부터 종결까지 관여했고, 재량껏 기소 여부를 판단했다. 검찰 수사를 제한한 첫 조치는 검찰총장 직할부대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폐지였다(2013년). 지난해부터는 검찰의 수사 범위가 제한됐다. 검찰은 ‘6대 중대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산업·대형참사)만 수사한다. ‘박병석 중재안’은 검찰의 수사 범위를 2대 범죄(부패·경제)로 다시 축소하고, 2대 범죄에 대한 수사권도 장차 신설될 중대범죄수사청에 이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검찰의 수사 기능이 경찰, 중수청, 공수처로 분해되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지휘권도 얄팍해졌다. 경찰은 수사개시권에 이어 지난해부터 수사종결권까지 확보했다. 검찰이 경찰 수사에 관여할 수단은 영장청구권과 보완수사권 정도이다. 검찰의 기소독점 견제 수단으로 재정신청 범위가 확대됐고 검찰 수사심의위가 도입됐다.

한국 사회에서 검찰은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수단이자 문제의 일부였다. ‘문제 해결 수단’인 검찰과 ‘문제의 일부’인 검찰은 강력한 수사권에서 비롯된 동전의 양면이다. 검찰의 ‘문제 해결’ 기능을 살리면서 검찰권 남용과 같은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에 6대 중대범죄 수사권을 남기는 대신 수사지휘권을 대폭 축소했다. 그러나 현 정부와 ‘윤석열 검찰’의 밀월기에 이 어설픈 절충안이 마련된 이후 검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알고 있다. ‘추·윤 대전’의 본질은 검찰의 수사권 행사라는 ‘절대반지’를 둘러싼 이전투구였다. 그 난전에서 개혁과 반개혁, 구적폐와 신적폐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선후와 인과를 알 수 없게 엉켜버렸다. 그런 맥락까지 염두에 둔다면 ‘박병석 중재안’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자른 입법적 결단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절대반지를 차지하려고 다투느니 차라리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입법적 결단과 입법적 도박은 백지 한 장 차이다. 검찰의 문제를 없애자고 검찰의 문제 해결 기능까지 없애는 것이니 공백이 클 수밖에 없다. 막강해진 경찰권의 견제, 경찰의 사건 처리 지연 해소, 피의자 인권침해 방지, 공수처·중수청의 수사역량 확보, 경찰·공수처·중수청의 수사 독립성 및 정치적 중립성 확보 방안 등이 내실 있게 마련되지 않으면 국가의 형사사법체계를 넝마로 만든 최악의 입법 참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검사가 주인공인 <비밀의 숲> <내부자들> <더킹>과 같은 드라마·영화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검찰발 기사가 몇 달씩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검찰의 전지전능에 대한 기대도, 배반당한 기대로 인한 환멸도 없을 것이다. 대중문화가 소비하는 검사의 이미지는 대개 셋 중 하나이다. 거악을 단죄하는 검사, 거악에 영합하는 검사, 거악인 검사. 검사가 영웅 아니면 반영웅인 것은 수사권을 갖고 있어서다. 수사권이 사라지면 뒤집힌 거울상인 영웅과 반영웅도 사라진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처럼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제 할 일을 묵묵히 하는 모습이 검사의 새로운 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윤석열 시대’에 칼잡이 검사의 시대가 저무는 건 역설이다. 검사들은 총장이 직을 박차고 나가 대선에 직행할 때 불길한 조짐을 읽고 심각한 실존적 위기임을 간파해야 했다. 검찰은 정치적 진지나 당파처럼 돼 버렸는데, 사실이 정말 그런가와 별개로 검찰이 그런 외관을 띤다는 것 자체가 민주공화국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급기야 검찰이 국가권력을 접수한 모양새가 되었고, 이른바 ‘검찰 공화국’에 대한 우려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는 지기 전에 가장 붉고, 달은 차면 기우는 법이다. 그러나 다수 검사들은 무신경해 보였다. 어쩌면 보통사람의 감각과 동떨어진 검사들의 이런 집단 무의식이야말로 오늘의 상황에 이른 근본 원인인지 모른다. 정의로운 칼잡이 검사를 여럿 알고 있고 그들의 좌절에 공감하지만 한 시대를 애도하는 이 조사(弔詞)를 쓰면서도 검사들의 비분강개에 마냥 고개를 주억거릴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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