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정치와 공생의 정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의결돼 마침내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법이 공포됐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시민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권력형 비리가 창궐할 것이라는 검찰의 시일야방성대곡에 아연실색했지만, 무엇보다 더불어민주당의 추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검찰, 국민의힘, 보수언론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아 저렇게 돌파할 수 있는 거였구나, 그렇구나. 국민적 합의, 야당의 협조 타령을 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뤄온 지난 5년의 진심을 매우 잘 알겠다.

어디 5년뿐이랴. 차별금지법안이 처음 발의된 것은 2007년이다. 지난 15년 동안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가 지나갔고,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의 자리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동안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시민사회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토론회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고, 삭발과 단식농성, 도보행진, 오체투지에 이르기까지 대화, 읍소, 간청, 투쟁, 그야말로 안 해본 것이 없다.

작년 이맘때에는 본인인증이라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10만명 넘는 시민들이 국회 입법청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차별금지는 실존적 정의를 향한 외침이자 절박한 생존의 요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민주당은 항상 이유를 댔다. 여당 혹은 야당이 협조하지 않고,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부재(不在)의 정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의(代議)민주주의가 대표해야 할 사람들의 목소리가 부재한 정치 공간에서, 혐오로 무장한 일부 종교 세력이 과잉 대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차별금지법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생명과 안전,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보호하는 대부분의 법률은 조문 한 줄마다 때로는 수년에 걸친 시민들의 투쟁과 헌신, 심지어 죽음이 깃들어 있다.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중대재해처벌법이 그러했고, 기초생활보장법과 장애인복지법, 심지어 사회적참사특별법이 그러했다. 이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법을 만들고 개정하기 위해 풍찬노숙하며 애원하고 투쟁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부재의 정치는 선별적으로 작동한다.

적대적 ‘공생(共生)의 정치’는 부재의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서로 극렬하게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들이다. 민주당의 정치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아도 선거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민주당에 표를 던지는, 좋게 포장한다면 비판적 지지세력, 본질을 말하자면 정치적 인질을 양산해내는 최적의 시스템이니 말이다. 정치적 지향은 다르겠지만 국민의힘에 표를 던진 시민들 중에도 이런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거대 양당의 이러한 적대적 공생은 그들에게는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지만 시민들에게는 부재의 정치라는 시련을 던져줄 뿐이다.

내일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는 날이다.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의 자리가 뒤바뀌는 날이다. 그리고 두 명의 인권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단식을 시작한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새 정부에서 불평등과 차별이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구조적 성차별은 이미 사라졌다는 당선인의 현실 인식, 이주민 건강보험에 대한 왜곡된 정보 유포, 장애인 권리투쟁에 대한 당대표의 폄훼를 보면 그러한 우려는 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차별금지법 제정도 더욱 시급해졌다. 국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민주당은 당장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 법안을 처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재의 정치를 끝내고, 적대적 공존이 아닌 시민과 공생하는 정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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