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에 대한 집단적 위선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의 화이부동] 다양성에 대한 집단적 위선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은 유전적 ‘보험증서’ 같은 기능을 한다.”(레베카 코스타)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약할수록 진정한 자기 인식 능력도 떨어진다.”(마이클 린치) “너무 유사한 집단은 새로운 정보를 논의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어렵다.”(제임스 마치) “동질성이 강한 집단은 다양성이 강한 집단에 비해 더 쉽게 결집하며, 응집력이 높아질수록 외부 의견과 고립되고 집단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 결과 집단의 판단이 옳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제임스 서로위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다양성을 예찬하는 명언들이다. 우리 주변엔 이런 다양성 예찬론이 흘러넘친다. 혹 다양성을 비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거의 없을 게다. 다양성은 아름다운 단어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혹 집단적 위선은 아닌가? 다양성 예찬론이 시사하는 것처럼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다양성의 힘을 믿는다면, 우리 사회는 다양성이 흘러넘쳐야 할 텐데도 사정은 전혀 그렇질 못하니 이게 웬일인가?

정치를 보자. 정치인들은 누구 못지않게 다양성의 가치를 역설하지만, 정치판의 현실은 정반대다. 국회의원의 인적 구성은 다양한가? 연령·성·학벌 등 모든 면에서 대단히 획일적인 집단이다. 의견의 다양성은 살아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일사불란한 군대 조직과 비슷하다. 아무리 논란의 소지가 큰 법안도 중요하다고 판단하면 한 정당의 의원 전원이 100% 찬성 투표를 던지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당의 일사불란한 획일성에 반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의원은 강성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온갖 인신공격을 퍼붓곤 한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는 동료 의원들도 없다. 이런 기회에 강성 지지자들의 눈에 들어 재미를 보자는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런 공격에 가세하는 의원들마저 있다. 다양성? 그건 배신·변절·이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다가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배신·변절·이적을 단호하게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계속 다양성을 저주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걸핏하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외쳐대니,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정권 인사마다 왜 다양성 훼손할까

문재인 정권은 동질성을 추구하면서 다양성을 거부한 대표적인 정권이었지만, 문재인의 임기말 지지율은 유례없이 높았다. 동질적인 ‘집토끼’를 잘 지킨 덕분일까? 이걸 보고 뭔가 느낀 게 있었던 걸까? 윤석열 정권의 초기 인사가 ‘다양성 죽이기’로 나아갔으니 말이다. 그 문제점을 경향신문 편집인 양권모가 다음과 같이 잘 지적했다.

“지역, 세대, 성별, 학력, 직능, 계층에서 이토록 다양성이 허물어진 내각은 처음이다. ‘무지개 내각’은 고사하고 칙칙한 단색의 내각이다. 동종교배 집단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집단 사고에 빠져 반대 의견에 귀닫고, 자신들이 옳다는 독선만 강해지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다양성이 정녕 바람직한 것이라면, 정권들은 왜 스스로 다양성을 거부하는 자해를 저지른 걸까? 나는 우리의 다양성 논의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다양성엔 명암(明暗)이 있음에도 우리는 다양성의 좋은 점만 이야기할 뿐 그 한계에 대해선 굳게 침묵함으로써 다양성에 대한 위선의 문화를 조성하는 데에 일조한 건 아닐까?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다양성의 한계는 그걸 실천하는 게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양성의 장점을 당위로서 역설할 뿐 그런 어려움을 널리 알리면서 돌파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선 거의 말하지 않는다.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우리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양성은 기분 좋은 공존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마치 다양성이 기분 좋은 공존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 삶의 방식은 사실상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 피터 우드의 다음 말은 꼭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낯선 것에 대해 갖고 있는 불안감이나 거부감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진정한 다양성은 때로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초, 서양의 선교사들이 태평양 건너편을 탐사하러 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몇 주를 보냈고, 그들 중 몇몇은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다양성은 의외로 복잡한 개념이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대학생들이 인종·종교·사회계급 같은 인구학적 범주에서의 다양성 증가는 강력히 지지하는 반면, 도덕적인 다양성(논란이 많은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견)에 대해서는 훨씬 덜 호의적이었고, 수업시간 중에는 도덕적인 다양성을 환영했지만 그들이 함께 살고 교류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도덕적인 다양성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이트는 이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다양성은 콜레스테롤 같다. 즉 좋은 종류가 있고 나쁜 종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이 둘을 극대화하려 해서는 안 될지 모른다. 모든 인종에게 열려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진보주의자들의 태도는 옳다. 한편 공통의 공유된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생각도 옳은 것일 수 있다.”

다양성의 공적 가치와 사적 가치가 충돌하는 문제도 있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찰스 콘래드는 “기업 조직에서 능력과 실력만으로 승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사람들의 동질성에 대한 집착을 들었다. 그의 주장을 좀 풀어서 소개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배짱 맞는 분위기’로 망하지 말길

인사권자는 인종, 성, 사회경제적 배경, 거주 지역, 교육 등을 중심으로 자신과의 동질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복잡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늘 혼동스럽고, 스트레스가 많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동질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위기 시에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자신의 주변이 예측 가능한(잘 아는, 그러니까 안정되게 믿을 수 있고 충실한)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혼동, 불확실성, 모호성이 감소된다.

또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자신과 이질적이기보다는 동질적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가 쉽다. 예상치 못했던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들에게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배짱이 맞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해야 높은 생산성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동질성을 중히 여기는 연고·정실주의는 바로 그 ‘배짱 맞는 분위기’를 제공해주는 큰 장점을 갖고 있다.

문재인 정권과 윤석열 정권의 인사가 다양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이유는 바로 그런 ‘배짱 맞는 분위기’ 형성을 위한 것이었을 게다. 그런 동질성 추구에 적잖은 이점이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다. 동질성의 장점은 즉각 확인할 수 있는 반면, 다양성의 장점은 확인이 쉽지 않으며 시간이 비교적 오래 걸린다.

다양성은 장점보다는 다양성이 없을 때 결정적인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주목받아야 할 개념이다.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은 동질적이고 비슷한 생각으로 뭉친 공동체는 극단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은 반면, 다양하고 이질적인 공동체는 평균으로 수렴함으로써 중도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여러가지 맥락에서 사람들의 견해는 확증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점점 극단성을 띠는데, 내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감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도가 꼭 좋은 건 아니라는 점에서 다양성의 정치적 장점에 의문을 가져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특정 정치집단이 극단으로 치달아 망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양성 결여다. 매우 잘못된 결정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동력이 바로 다양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배짱 맞는 분위기’ 형성에 눈독을 들여 얻는 이익의 총합이 아무리 크다 한들 망하고 나서야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훗날 윤석열 정권이 스스로 저지른 다양성 탄압으로 인해 망했다는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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