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작업실

고재열 여행감독

중년의 남자에겐 자기만의 동굴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중년에 들어선 지인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만약 나를 위한 아지트를 만든다면 몇 명을 초대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겠냐고. 4명, 6명, 8명…. 대답은 제각각이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 분명 ‘나를 위한 아지트’라고 했는데도 다들 사람을 모아 살롱을 구축하려 든다.

고재열 여행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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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대가의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문득 그 작업실의 공통점을 깨달았다. 그들의 작업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초대하기 위해 설계된 공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 공간에서 모임을 할 때는 편안하면서도 뭔가 불편함이 있었다. 주인을 위해 이 공간을 빨리 내줘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이 구축한 아지트를 자랑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공간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다고,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뿐이다. 세월이 지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혼자만의 공간에서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창작의 희열’ 때문이었다는 것을. 자신을 위해 구축한 공간에서 자신에게 집중해서 얻어낸 창작, 그들은 그 기쁨을 온전히 독식하고 있었다.

소설가 김훈의 작업실에는 문학이 없다. 오직 문학의 재료만 있을 뿐이다. <동사강목> <연려실기술> 등 역사서 국역본과 한글사전, 한자대자전 등 문학의 재료만 빼곡하다. 이런 자료들이 언제든 확인할 수 있게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거나 탁자에 펼쳐져 있다. 운동 기구는 언제든 덤벼들 수 있도록 놓여 있고, 냉장고에는 간식으로 먹는 방울토마토만 조금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손님을 맞을 준비는 없다.

교수직을 내려놓고 화가로 전념한 김정운의 외딴섬 작업실도 그렇다. 그의 작업실이 강남 모처의 지하실에 있을 때, 여수 어촌마을에 있을 때 그리고 지금 외딴섬 바닷가 작업실까지 모두 찾아가 보았다. 국문책뿐만 아니라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이 각국의 개성을 나타내는 서재가 매력적이었던 그곳은 당장이라도 붓을 들 수 있도록 잘 세팅되어 있다.

김정운 교수가 여수의 멘토로 ‘추앙하는’ 박치호 화백의 작업실 역시 조용한 나르시시스트 연못이었다.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에 박 화백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토르소 그림이 대작, 중작, 소작 조화롭게 걸려 있어 마치 전시회장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작품들에 포위된 채 그는 새로운 토르소 그림을 그려낸다. 그 반복 아닌 반복에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

서울연구원장을 지낸 이창현 교수의 백사실계곡 ‘송와’는 절충형이다. 건물 내 가장 큰 공간과 마당은 불교철학 세미나나 요가, 명상 모임을 위해 내어준다. 힘들여 구축한 공간이지만 ‘창조적 공유’를 허락한다. 그를 위한 공간은 간이 스튜디오다. 막 시작한 인물 포트레이트 작업을 위해 그는 언제든 촬영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세팅해 놓고 있다.

누군가의 작업실은 그의 도서관이자 박물관이고 또한 수집창고다. 자칫 과시적인 공간이 되기 쉬운데 과잉을 덜어내고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으로만 채운 작업실은 매력적이다. 비싼 와인과 훌륭한 음식이 없어도 그런 공간에 초대되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을 대접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대접하는 일이 더 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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