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에서 우정으로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
사랑도 수긍할 수 있는 이성
그 접합점 조성하는 게 정치 과제

집단이 공공의 선으로 결합될 때
의견 독점하지 않는 우정 지속성

“사랑은 이성을 두려워한다. 이성은 사랑을 두려워한다. 둘 다 상대방 없이 견디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사랑이 처한 곤경이자 이성이 처한 곤경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인화된 사회>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대다수 사람은 안다. 사랑과 이성의 소통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사랑은 무엇보다 마음으로 소통하고, 그 마음에는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자기 나름’의 이유를 이성은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때로 사랑은 자기 나름의 이유로 남들에게 뻔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그래서 사랑이 눈을 멀게 한다고 여긴다. 사랑에게도 할 말은 있다. 우리 마음에도 이성 못지않은 나름의 질서와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관계가 이렇다 보니 사랑은 이성에, 이성은 사랑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뜬금없이 사랑과 이성을 꺼내는 이유는 요즘 사회적 논란이 된 ‘팬덤정치’ 때문이다. 팬덤정치는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유형의 정치인데 디지털 기술이 만든 네트워크의 확산에 기반을 둔다. 디지털 기술은 유권자와 대표자의 거리를 그 어느 때보다 좁혀 놓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표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유권자들의 압박에 노출돼 있다. ‘참여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의사결정과정에 유권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집단적 의사결정과정에 나타나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대체로 강경한 태도를 지닌 이들의 의견이 집단 내에 지배적 영향을 발휘하는 경향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경파의 의견이 단호할수록 다른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카스 선스타인은 <사회에 왜 이견이 필요한가?>에서 이렇게 강경한 목소리가 국익이나 사명감 같은 대의를 내세울 때 의사결정에서 더 영향력을 발휘하고 이견의 견제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구성원 상호 간 소속감이나 유대감이 강한 경우엔 극단화가 더 심해진다. 팬덤정치는 정확하게 이런 위험에 노출돼 있다.

팬덤정치의 더 큰 문제는 이런 경향이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팬덤정치는 특정 인물이 지향하는 바와 특정 집단의 열렬히 갈망하는 바가 ‘상호일치’할 때 시작된다. 이렇게 일치된 지향점이 ‘대의’가 될 때,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일치된 마음에는 이성 못지않은 나름의 질서와 논리가 성립한다. 이로 인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가운데 외부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이 팬덤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조직 역시 결과적으로 폐쇄적이 되고 외부에선 이들이 이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사랑과 이성 사이에서 팬덤과 비판자들이 자연스레 서로 등을 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우만이 단호히 말하듯 사랑과 이성을 떼어놓으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기본적으로 정치가 그렇다. 정치는 사랑만으로도, 이성만으로도 작동할 수가 없다. 정치는 정념의 표출이기도 하며 결국 정치는 그 정념을 이성적 가치로 만들어 사회에 배분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 사랑도 수긍할 수 있는 이성의 접합점을 만들어가는 것은 정치의 오래된 과제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정치체제가 어떤 식으로든 우정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용성을 위한 우정, 즐거움을 위한 우정, 덕을 위한 우정이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유용성을 위한 우정은 서로에게 얻을 것이 없다면 끝나는 관계이고, 즐거움을 위한 우정은 즐겁지 않다면 끝나는 관계다. 하지만 덕으로 맺어진 우정은 다르다.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맺어진 우정은 신뢰할 만한 것이기에 오래 간다. 이런 우정은 친구가 때로 이성적이지 않더라도 내치지 않고 서슴없이 충고할 수 있게 해준다. 덕을 위한 우정이 의견을 독점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1998년 생겨난 미국의 시민풀뿌리 조직 무브온이 24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회원이 500만명에 이르는 무브온은, 무엇보다 특정 정치인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나 대체에너지와 같은 정책별 이슈를 폭넓게 만들어 움직이고, 투표를 통해 주요 의사결정을 해나가고 있다. 이들이 의견을 독점하지 않는 우정을 오래 함께하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그들을 결합해 주는 것이 (공공의) 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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