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갚지 못하고 있는 빚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어떻게 한국에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진보와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5월의 광주를 기념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이룩해낸 자랑스러운 나라를 배우며,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민주화가 이뤄낸 동력을 우리 국민 모두가 존중한다. 다만 그 후광을 누리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민주주의와 죽은 열사에 대한 존중도 살아 있는 유족에 대한 배려도 없는 듯하다. 그들의 본업인 정치에서는 제도 하나 만들지 못하고 그저 달콤한 말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법치국가의 틀에서 국가공동체가 민주화 열사들의 희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자 발의된 법안이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다.

현재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으로 국한되어 있는 제도를 확장해 부마항쟁, 6·10항쟁 등 역사의 모든 노력을 차별 없이 보호하려는 목적이 담겨있다. 사망, 행방불명, 부상자, 유족 등 829명만을 대상으로 하며, 다른 예우법률과 유사하게 기념사업 및 시설물 설치와 교육, 양로, 양육, 의료 지원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박종철, 이한열을 비롯한 민주화 열사들은 영웅이나 초인이 아니었다.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한 끗의 차이가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선택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 각자도생보다 이웃과 동료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더 바람직하고 행복하다는 사실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다만 우리의 지난 시대는 상식대로 살아가기 위한 비용이 적지 않았다. 식민지배, 전쟁과 가난, 독재의 현실에서 상식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만큼 큰 희생이 필요한 선택이기도 했다. 바로 그 한 끗의 차이로 나아갔던 독립운동가, 산업화 시대의 희생자들, 민주화 열사들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충분히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민주유공자법안은 일부 정치인들의 왜곡된 비난으로 인해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자식이 살아 돌아오는 것 말고 바랄 게 없는 부모님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혜와 공정의 문제가 아니다. 존중과 역사의 문제다. 역사를 일궈 온 고작 800명의 희생조차 인정하지 않는 나라라면, 미래에 혹여나 크고 작은 위기가 생기더라도 더 이상 나설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 1월, 이한열 열사의 모친인 배은심 여사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들 곁으로 떠나셨다. 결국 배은심 여사의 마지막 과제인 민주유공자법은 살아생전 실현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배은심과 이한열 두 사람 모두에게 큰 빚만 남긴 채 갚을 기회조차 놓쳤다.

유가족분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은 남은 자들의 빚이 되고 있다. 역사를 기억할 누군가가 또 떠나기 전에 우리 사회가 갚아야 할 민주주의는 분명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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