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으니

서정홍 농부 시인

지난 6월17일은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풀무학교)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강연이 저녁 7시30분부터라 오전은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 해도 농촌 학생들 만나는 일은 거절하지 않고 억지로 짬을 내어서라도 간다. 자라나는 학생들이 있기에 농사지을 맛이 나는데 거절해야 할 까닭이 없다.

서정홍 농부 시인

서정홍 농부 시인

그날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천천히 몸을 풀고 산밭으로 갔다. 몸이 피곤해서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어도 몸이 저절로 일어난다. “하이고, 이제 당신이나 나나 농사꾼이 다 되어가네요.” 오늘따라 아내가 하는 그 말이 싫지가 않다. 농사지으며 산 지, 고작 17년 지났는데 농사꾼이 다 되어간다니!

한 해 가운데 유월처럼 몸과 마음이 바쁜 때는 없다. 마늘과 양파 뽑아야지, 감자 캐야지, 들깨씨 뿌려야지, 녹두와 팥 심어야지, 참깨밭·고추밭·토란밭·생강밭으로 두루두루 다니며 김매야지, 해야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오늘 오전은 다 잊고 감자만 캤다. 호미에 찍힌 놈, 못생긴 놈, 벌레 먹은 놈, 빛깔 퍼런 놈, 도시 사람들 싫어하는 놈들 다 가려내고 상자에 담았다.

못난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호미에 찍히고 벌레 먹은 못난 감자가 농부를 살린다. 왜냐하면 잘생긴 감자는 모두 도시 사람들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농부의 마음을 몰라주어도 좋다. 내 손으로 농사지은 농산물로 밥상을 차려, 식구들이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것만 생각해도 그저 흐뭇하니까 말이다.

감자를 정성껏 상자에 담아 택배 준비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는 풀무학교로 갔다. 풀무학교는 1958년 내가 태어나던 해에 설립한 학교다. 그래서 그런지 남다르게 정이 간다. 학생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마음 나눌 ‘동지’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다. 학교에 일찍 닿아 삼십 분 남짓 학교를 둘러보았다. 학생들이 손수 심었다는 논에는 모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밭에는 여러 가지 채소가 자라고 꽃이 피어 오가는 사람들을 반겨주었다.

65년이란 긴 세월 동안 흔들림 없이 이 학교를 지키고 살려낸 선생님들과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이 스쳐지나갔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나를 안내하던 학생의 어머니가, ‘풀무학교는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베지 않고 그대로 둔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농부가 되려는 꿈을 가진 학생들과 두어 시간 농업과 먹고사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서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기도 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강연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농부는 별을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농’자가 무슨 뜻이라 했습니까?” “이웃 마을에 사는 선배 농부가 그랬다네. 별 진(辰)에 노래 곡(曲)을 합쳐서 농(農)자가 되었다고 하더군. 별을 노래하는 사람이 농부(農夫)라고.”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학생을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멀고도 어두운 길이 결코 멀거나 어둡지 않았다. ‘편한 곳보다 되도록 힘든 곳을 택하라. 그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풀무 직업 십계’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학생들이 이 땅에 있어 사는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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