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법대 망국론

박병률 경제부장

2000년대 초반 서울대 망국론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경제·문화 등 대부분의 영역을 장악하면서 제기됐던 사회적 논쟁이었다. “고대 나와도 기자하느냐”는 이회창 대선 후보의 발언이 나왔던 것도 이때였다. 학벌지상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을까, 서울대 법대 출신의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상고를 나온 김대중,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박병률 경제부장

박병률 경제부장

지난주 중요한 인사청문회가 두 건 있었다. 한 건은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였고, 또 한 건은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였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서울법대 출신이다. 대법관이야 그렇다쳐도 공정거래원장까지 서울법대 출신을 골라야 했을까. 더구나 한후보자는 보험연구원장을 지내는 등 기업보다는 금융전문가에 더 가깝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법대 편애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하면서 대통령실을 개편하네 어쩌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서울법대에 대한 믿음은 공고해 보인다.

서울법대 79학번인 윤석열 대통령은 보수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 학벌을 갖고 있다. 과거와 달리 윤 대통령이 당선된 데는 그간 사회적 다양성이 강화되면서 학벌에 대한 논란이 잦아진 탓이 크다. 동시에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가 득세한 것도 서울법대 출신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을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윤 대통령은 “할당이나 안배를 하지 않고 능력만 보고 뽑았다”며 서울법대 출신을 초대내각 전면에 배치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진 외교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서울법대다. 그 기조에 서울대 타과 출신들도 대거 중용됐다.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의대 출신들이 줄줄이 윤석열 행정부의 핵심 요직에 앉아있다.

윤석열 정부의 서울법대 편애는 여당의 분열도 불러왔다. 대선에 기여하고도 아직 한자리를 얻지 못한 여당 관계자들은 “서울법대 출신이어도 그랬겠느냐”는 푸념을 많이 한다.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100일 만에 20%대까지 추락한 것은 여권 지지자들의 이탈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백보 양보해 윤석열 행정부가 일을 잘하고는 있는 것일까. 최근 들어 사회적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고 있다. 남쪽에서 거칠게 올라온다는 태풍 힌남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온통 경제가 나쁘다는 소식뿐이니 시민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1달러 환율이 1360원을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월말에는 1400원도 예상해야 한다. 무역수지 적자는 월간 기준으로 66년 만에 가장 나빴다. 세계 무역질서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부의 대응은 신속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한국 전기차들이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게 됐지만 부랴부랴 워싱턴으로 떠난 정부 대표단은 기쁜 소식을 들고 오지 못했다.

대출받아 내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금리 상승을 이미 체감하고 있다. 손실을 본 주가, 가상통화는 언제나 원금을 회복할지 모르겠다. 하반기에는 경제가 더 나쁘다면서요, 만나는 기업인마다 금융인마다 주고받는 안부에는 근심, 걱정이 묻어 있다. 서울 강남에서도 “세금을 깎아달랬지 집값을 깎아달랬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온다고 한다.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것은 전 정권과 야당 대표에 대한 전방위 수사 정도다.

최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행보를 강화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경제지표만 보자면 ‘무능하다’는 말을 들어도 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윤 대통령 말마따나 ‘오직 능력만 보고’ 내각을 배치했는데도 성적표가 고작 이 정도라면 그간 ‘무능한 진보’라고 공격했던 보수로서는 민망스럽다.

서울법대 출신들의 공부머리야 시비를 걸기 어렵다. 하지만 일을 시켜보면 안다.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다르다는 것을. 시험만으로 민생을 살릴 수 있다면 몇번이고 서울법대 출신들을 써야겠지만, 국가 운영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국내외 갈등과 난제를 서로 다른 색깔의 사람들과 만나 협의와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내각이 그렇다. 만약 국내 최고 학벌로 이뤄진 윤석열 정부가 실패한다면 보수에 대한 또 다른 책임론이 제기될지 모를 일이다. 서울대 망국론, 아니 서울법대 망국론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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