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광명을 배반한 아득한 동굴에서/ 다 썩은 들보라 문허진 성채 위 너 헐로 도라단이는/ 가엽슨 빡쥐여! 어둠의 왕자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잣집 庫간으로 도망했고/ 대붕도 북해로 날아간 지 임이 오래거늘/ ….”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육사(1904~1944)의 시 ‘편복’의 일부다, 편복은 박쥐를 말한다. 1939~1940년에 지은 이 시는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대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참혹한 현실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육사의 절친인 신석초는 1940년에 이 시를 읽고 “형의 많은 시사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편복’은 일제의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되지 못했다. 광복 후인 1956년 ‘육사 시집’에 처음 수록되어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시의 친필 원고는 2018년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이육사의 또 다른 친필 편지와 엽서가 곧 등록문화재가 된다. 1930년대 이육사가 지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이 가운데 1936년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아래 사진)가 있다.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육사와 동주의 친필

“석초형! 떠나서 대구에 오니 귀病이 나서 한주일 치료를 했지요. 그리고 中途 경주서 一泊을 하고 불국사를 단녀서 昨夜 이곳에 왓읍니다. … 명사 오십리에 동해의 잔물결이 두 사람의 거러간 자취조차 쓰처바리지 못하고 보드랍게 할터 갑니다. … 함게 와서 보앗드면 야복 조화하지 안을 것을 건강하소서.” 신석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윤동주(1917~1945)도 친필 원고를 남겼다. 현재 전해오는 친필은 시 144편과 산문 4편. 윤동주의 친필 원고가 지금까지 전해온 것은 연희전문 시절의 친구인 강처중과 후배인 정병욱, 여동생 윤혜원의 정성 덕분이었다. 이 가운데 정병욱의 스토리가 각별하다,

1941년 윤동주는 19편의 시를 정리한 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그마한 자필 시집이었다. 그렇게 만든 원고 3부 가운데 하나를 정병욱에게 건넸다. 원고 맨 앞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呈”이라고 썼다. 이듬해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윤동주의 원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셔야 합니다.” 어머니는 마룻바닥 깊은 곳에 원고를 정성껏 보관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시편들은 다른 원고와 함께 1948년 1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출간되었다. 이후 윤동주의 친필 원고들은 유족들이 보관하다 2013년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에 원고를 모두 기증했고 이 원고들은 2018년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근대기 두 시인의 육필 원고를 감상하는 일은 특별하고 매력적인 경험이다.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잉크펜 글씨, 다소 낯선 어휘와 낯선 문장들. 낯설기에 더욱 정감이 간다. 이육사와 윤동주 등 근대기 문인의 작품 초판본을 복제해 즐기는 뉴트로(New+Retro) 열풍도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이육사의 필체는 유려하고 시원하며 또한 호방하다. 힘과 자신감이 넘쳐 거침이 없다. 이육사 시의 육중함이 글씨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묵직함의 미학이라고 할까. 반면, 윤동주의 필체는 단정하고 담백하다. 무언가 쑥스러워하는 듯 해맑은 소년의 느낌이다. 정병욱에게 맡겼던 원고 첫 장의 글씨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정병욱 형 앞에/윤동주 呈”. 빛바랜 종이, 또박또박 반듯하게 써넣은 글씨를 한 자 한 자 읽노라면 아련한 슬픔이 밀려온다. 투명함의 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글로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 그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에 이육사와 윤동주는 문학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이육사는 늘 “시는 행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참여”라고 외쳤다. 식민지청년 윤동주에게 시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이었다. 그 흔적이 두 시인의 친필 원고 글씨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게 바로 친필 원고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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