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북악산 바위의 1·21사태 총탄 자국.

북악산 바위의 1·21사태 총탄 자국.

<효자동 이발사>라는 영화가 있다. 청와대 바로 앞인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서 이발관을 운영하는 이발사 성한모(송강호)의 일상을 다룬 영화다. 1960~1980년대 정치권력이 보통 사람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의 스토리 전개상, 1·21사태가 중요한 분기점 역할을 한다. 1968년 1월21일 북한의 무장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1·21사태. 세상을 경악시킨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성한모와 가족의 삶을, 세상을 바라보는 성한모의 인식을 뒤바꾸어 놓는다. 스토리가 다소 작위적이지만, 영화는 재미있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청와대라는 공간은 대체 어떤 곳인가, 청와대의 주인은 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대략 이런 생각들이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2016년 늦가을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청와대 뒤편 북악산 청운대에 올랐다. 청운대는 북악산에서 가장 높은 곳. 바로 밑은 청와대다. 시위대의 함성이 막힘없이 다가왔다. 광장에서 듣는 함성보다 더 묵직했고 더 무서웠다. 청와대 사람들이 이곳에서 촛불시위를 목격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상상도 해봤다.

청운대 바로 옆으로 한양도성이 지나간다. 그 길목의 어느 소나무엔 10여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1·21사태 때 북한 공작원들이 도주하면서 우리 군경과 벌였던 교전의 흔적이다. 북악산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능선의 어느 바위에도 50여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북악산의 한양도성은 청와대 북쪽을 감싸고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경복궁을 지키는 도성이었는데 1·21사태 이후 청와대의 주요 방어시설로 활용되었다. 청와대의 후방 경비초소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 문화유산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넘어 북악산 한양도성은 20세기 후반 청와대와 사실상 한 몸이었다. 그렇기에 1·21사태와 한양도성을 빼놓고 청와대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청와대 앞 통의동에는 보안여관이 있다. 지금은 갤러리로 쓰고 있지만 1930년대 초부터 2004년까지 여관으로 영업을 했던 곳이다. 통금이 있던 1960~1970년대, 청와대 직원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도 했다. 이 여관에서 새벽까지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한 직원도 있다. 보안여관은 청와대 경호부대 병사들의 면회 장소이기도 했다. 주말 면회 시간이 되면 치킨 냄새가 진동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청와대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청와대가 현직 대통령 통치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마감했다. 금기의 공간에서 일상의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청와대는 그 자체로 중요한 근현대사의 현장이기에 청와대 관람은 새롭고 의미 있는 경험이다. 우리 시대의 중요한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청와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청와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별로 아는 게 없다. 국무회의, 여야 영수회담, 대변인 브리핑, 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초청 오찬, 어린이날 초청 행사…. 뉴스에서 보았던 이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분명 그 이상일 텐데, 보통 사람들로선 그 이상의 내밀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경험하기 어렵다. 본관, 영빈관, 관저 등 건물 안팎을 둘러보며 나름대로 전직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의 흔적을 추론해보지만 상상의 범위가 쉽게 확장되지 않는다. 건물들이 대부분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소설 <뿌리깊은나무>(2006년 출간)가 떠오른다. 세종시대 한글창제를 둘러싸고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그린 팩션이다. 청와대를 무대로 한 팩션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청와대의 건물 자체 못지않게 거기 담겨 있는 스토리를 더 많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효자동 이발사>와 보안여관, 1·21사태가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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