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은 누구의 음모인가?

임지현 서강대 교수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해서 처음 장을 보았다. ‘할라 미로프스카’라는 전통시장이다. 선명한 색깔의 과일과 야채, 암탉의 종에 따라 분류해 놓은 계란, 러시아어로 시끌시끌한 그루지야 제빵소, 시골 치즈와 가정식 해장 수프 등은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유적지보다는 시장 구경을 더 좋아하는 못난 역사가인 내게 이 시장은 딱 제격이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빈약한 상점마다 뱀처럼 구부러진 줄이 길게 서 있고, 연금생활자들이 수시간씩 걸리는 줄서기를 대신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회주의 시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오스카 랑게 같은 개혁 사회주의자들이 시장의 소매업 등은 개인 경영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는 현장의 절박함이 있었다.

1953년 동독의 베를린 봉기나 1956년 폴란드의 포즈난 봉기 당시 가장 자주 들리던 구호는 “빵을 달라”였다. 잔뜩 격앙되어 지역 당사를 공격한 군중은 먹을 게 없는 시장과 대조적으로 당사 내부의 관료 전용 특수상점의 풍요로움에 배반감을 느꼈다. 그들의 분노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정치범 생존자이자 베테랑 사회주의자였던 당시 폴란드 총리 치란키에비츠의 반응은 의외였다. 노동자의 정당인 공산당은 노동자들의 곤경에 따뜻한 시선을 돌리는 대신, 노동자 천국을 질시한 서방 제국주의의 음모를 찾아냈다. 그러니 해결책도 간단했다. 서방 제국주의와 결탁한 간첩을 색출해서 제거하면 만사형통이었다.

동유럽 현실사회주의의 정치 담론에서 음모론이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포위된 요새’ 신드롬에서 시작한 음모론은 정치 담론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 제국주의 음모는 분쇄되어야 했고, 간첩들은 색출해야 했다.

음모론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들이 공론장의 토론을 거쳐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제로섬 게임의 정치 문화를 낳는다. 간첩은 협상 대상이 아니고 적의 음모는 파기되어야 했다. 냉전체제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은 살아남았다.

푸틴의 침략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서방의 제국주의 음모에 결연히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거꾸로 폴란드의 반공 극우 정권은 푸틴의 음모에 넘어간 독일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각을 세운다. 심지어 폴란드의 국토교통부 차관은 자국 영내의 오데르강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환경 재앙이 폴란드 국가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독일의 음모라고 떠벌려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을 비롯해 100명에 가까운 폴란드 정치 엘리트들이 몰사한 스몰렌스크의 대통령 전용기 추락 사고에 대해서도 러시아 음모론이 끊이질 않는다. 블랙박스가 해독되어 카친스키 대통령의 무리한 착륙 지시가 사고의 원인임이 밝혀졌는데도 음모론은 가라앉을 줄 모른다. 러시아의 음모, 유럽연합의 음모, 그리고 그들과 결탁해 사건의 진실을 가리려는 폴란드 매국노들의 음모에 대한 비난은 기세가 등등하다.

냉전 시대의 폴란드 공산당과 탈냉전 시대의 반공주의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은 음모론의 정치적 문법을 공유한다. 1968년 공산당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이나 ‘법과 정의당’의 극단적 반공주의는 모두 폴란드 민족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외세와 결탁한 폴란드 매국노들의 음모론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다. 이들의 인식 지평에서는 자본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모두 매국노라는 점에서 한통속이다.

음모론의 정치 동학은 폴란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광주를 비롯해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음모로 돌리는 극우적 주장이나, 박헌영과 이강국 등 남로당 인사들을 미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북한의 제국주의 음모론은 묘하게도 닮아 있다.

문재인 정권 이래 음모론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독재정권의 특허인 ‘북한 간첩’ 음모론은 ‘토착 왜구’ 음모론으로, 자신들의 파국적 부동산정책 실패는 미 제국주의 대신 반동적 부자들의 음모로 황당하게 바뀌었다. 국민의힘 권력투쟁에서 등장하는 음모론은 상상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먹혀든다.

국경을 넘어 여야를 막론하고 이렇게 판치는 음모론은 도대체 누구의 음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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