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 서강대 교수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의 옛 수도이다. 리투아니아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았지만, 폴란드 군대가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하며 빌니우스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바람에 카우나스를 수도로 정했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카우나스는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나치 군대가 파죽지세로 파리까지 점령하자 3만명이 넘는 유럽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위협을 피해 리투아니아로 피란을 왔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 정부의 우호적인 난민정책 덕분에 카우나스는 갑자기 국제적 사교도시가 되었다. 1940년 6월 소련의 적군이 침공하기 전까지, 중립국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는 각국의 스파이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국적의 난민들, 난리통에 한몫 잡으려는 국제 협잡꾼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카우나스가 ‘발트해의 카사블랑카’로 불린 이유다.

추억의 영화팬들이라면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 <카사블랑카>를 기억할 것이다. 온갖 정보요원과 피란민들, 나치 장교와 현지 경찰, 레지스탕스 전사들이 담배 연기 가득한 주인공 릭의 ‘카페 아메리카’에서 묘한 긴장을 자아내는 영화의 분위기가 당시 카우나스의 이미지였다.

카우나스에는 스기하라기념관이라는 독특한 기억의 터가 있다. 스기하라 지우네는 일본 외교관으로 1939년 9월부터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강점한 이후 영사관이 문을 닫은 1940년 9월 초까지 카우나스의 일본국 대리영사를 지낸 인물이다.

스기하라는 임박한 나치의 학살을 피해 결사적으로 동유럽을 탈출하려는 유대인 난민들에게 2150장이 넘는 일본 통과 비자를 발부했다. 부모의 비자에 딸린 아이들, 또 그가 내준 영사관 인장으로 유대인 난민 조직에서 만든 가짜 비자까지 포함하면 많게는 6000명의 유대인들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 혹은 만주와 조선을 거쳐 일본 고베로 탈출할 수 있었다.

덕분에 스기하라는 야드바솀에서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의로운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에비앙 회담에서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길 거부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기타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하면 그의 결단은 더욱 돋보인다. 1940년 카우나스를 떠난 뒤에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베를린과 부쿠레슈티, 프라하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계속했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발발한 1939년 9월 스기하라가 헬싱키에서 카우나스로 단신 부임한 사실도 흥미롭다.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그는 1930년대 하얼빈에서 일본제국의 소련 감시 정보망을 움직였다. 하얼빈-헬싱키-카우나스-부쿠레슈티-프라하로 이어지는 그의 동선은 그가 소련의 접경지역에서 계속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스기하라기념관의 연구실장 리나스 벤클라우스카스에 따르면, 스기하라는 폴란드 저항군의 정보장교를 일본제국 영사관의 현지 고용인으로 썼다. 이는 많은 걸 시사해준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수천명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 스기하라에 대한 기억을 덮을 수는 없다. 많은 일본인 방문객들이 스기하라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글을 방명록에 남겼다. 그들이 남긴 글을 보니, 일본에서는 영어 교과서에 스기하라에 대한 지문도 있고 또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모양이다. 일본인인 게 자랑스럽다는 내용이 많다.

내가 방문한 11월5일에는 카우나스 필하모니에서 스기하라에게 헌정하는 이스라엘 작곡가의 ‘빛의 배’라는 교향곡 세계 초연이 있었다.

야드바솀 관장과 이스라엘 대사에 이어 일본 대사가 인사말을 했다. 리투아니아·일본 수교 100년을 맞는 올해 스기하라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가자는 내용이었다. 죽은 스기하라가 여전히 일본 외교의 한 축인 것이다.

‘기억 외교’라는 국제관계 연구 분야가 있다. 자기네의 기억만이 사실이고 상대방의 기억은 거짓이라는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지역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싸우는 ‘기억 전쟁’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스기하라를 찾아서 한·일 양국이 같이 기리는 ‘기억 외교’는 불가능한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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