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시간의 가치

지난 9월 중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했을 때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끈 장면 가운데 하나는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된 여왕의 관에 참배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대규모 군중이었다. 데이비드 베컴과 같은 대스타도 새벽 2시에 나와 12시간 넘게 줄을 서서 참배했다. 영국 언론만이 아니라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생방송으로 장시간 기다리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1953년 대관식을 기억하는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사람들이 형성한 대기줄은 한때 템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11㎞에 달했고, 대기 시간은 24시간이 넘었다.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사람들은 기다리는 시간에 대한 불평보다 오랜 기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왕에게 조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느끼는 공동체 감각을 진술하며, 줄서기를 ‘감동적인 경험’으로 묘사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이동 제한과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로 느끼지 못한 물리적 공간에서의 집단적 공동체 경험을 줄서기가 제공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영국 인류학자 케이트 폭스는 <영국인 관찰하기: 영국인 행동의 숨겨진 규칙들>에서 ‘줄서기’(queuing)를 가장 영국적 규칙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다. 영국은 여왕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보여주듯 계급 구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사회이다. 개인의 계급적 위치는 수 세대에 걸쳐 형성되고 계승되는 ‘문화자본’을 통해 지속되고 이는 억양, 단어, 옷차림, 매너 등의 세분화된 취향과 습관으로 일상에서 드러난다. 이처럼 계급적 위계와 구별짓기가 일상적인 영국 사회에서 줄서기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칙으로 ‘공정함’의 감각을 구성하는 순간으로 작동한다.

이와 유사하게 미국에서는 ‘문 잡아주기’가 이러한 공동체 일원으로서 수행하는 대표적 상호작용 행위로 작동한다. 앞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행위는 뒤따라오는 사람 역시 문을 이어서 잡아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안전에 책임을 지는 상호의존적 존재로서 정체성을 형성한다. 미국에서 문 잡아주기는 어렸을 때부터 공교육 기관에서 지속적으로 훈련받는다. 줄서기와 문 잡아주기는 모두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에 대한 인정과 돌봄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개인은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 정체성을 획득한다. 또한 이러한 기다리는 의례를 위반하는 것은 ‘존중받을 만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훼손하는 것으로, 대면 상황에서 찌푸린 인상과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거나, 직접적인 제재를 받기도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는 기다리는 시간이 가지는 사회적 가치를 급격하게 잃어온 듯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기다림은 사회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규칙으로 상호 존중과 돌봄이 경험되는 순간이라기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강압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불평등’으로 경험되는 듯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는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공평함을 이룩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경향은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 속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수많은 디지털 미디어 상품은 ‘기다리는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시간 효율성을 확장하라고 조언한다. 예컨대 ‘줄서기 앱’은 현장에서 굳이 기다릴 필요 없이 앱으로 줄서기 신청이 가능하다. 이는 앱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현장에서 그리 길지 않아 보이는 대기줄에서 기다리다 발길을 돌리게 하기도 한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확산되는 이러한 불평등은 흔히 새로운 시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개인의 탓으로 돌려진다. 여기서 기다리는 시간의 제거는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감각과 돌봄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확산한다. 여기에 ‘우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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