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과 애도라는 정치적 기획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는 패륜인가 애도인가. 공개하자고 주장하거나 유족 동의 없이 공개를 감행한 쪽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진정한 애도라고 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패륜이라거나 ‘미친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개인정보보호법이나 명예훼손 등 법적인 쟁점이나 2차 가해와 프라이버시 등 인권 쟁점은 지난 며칠간 많은 조명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은 공개하자거나 공개하지 말자는 주장에 깔려 있는 정치적 기획이다. 법적이나 도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정치적 기획이 가진 의도와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자.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촛불을 들고 다시 해야 되겠나”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단어 선택이다. 실제로 익명의 당 지도부 관계자는 “이슈가 최소 2년은 갈 것”이라고 희망 사항을 내비쳤으며, 거리로 나선 강경파 의원들은 “민주당 지도부가 촛불광장으로 나오기 전에 선도적으로” 나왔다고 외쳤다. 이태원 참사를 세월호 참사로 연결하고, 나아가 촛불집회로 이끌어보려는 기획이 엿보인다. 민주당 내에서도 명단 공개가 부적절하다는 반발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이 기획은 주로 친명계의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성공한다면 검찰의 칼끝 위에 서 있는 이 대표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 될 것이다.

미래의 일을 단정해서 말할 수 없겠으나, 재난의 정치화에 대해 축적되어 있는 연구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행동 연구의 성과에 기대어 보면 이 기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재난의 정쟁화와 정치화는 다른 것이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정치 세력들이 각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프레임을 짜고 정쟁화하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재난의 정치화는 대형 재난을 목격한 시민들이 언제든지 본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실감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의지나 능력이 없어 보이는 정부를 상대로 집합적인 항의를 벌이는 것이다. 재난은 많지만 정치화하는 재난은 드물다. 정권에 타격이 되려면 정치화해야 하는데, 이것은 예외적으로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럼 이태원 참사는 이런 예외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정치화했었던 재난은 세월호가 아니라 광우병 사태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는 무려 304명이 사망 혹은 실종된 재난이었지만 당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10%포인트 하락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총선이 다가오자 다시 회복되었다. 반면 광우병은 재난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뿐, 실제 재난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들불과 같이 정치화했다. 당시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은 40%포인트 넘게 떨어져 거의 4분의 1 토막이 났다.

지난 연구의 성과들을 보면, 재난이 정치화하기 위해서는 최소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재난이 사회적 위험과 연관되어 있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미국산 소고기가 실제로 위험하더라도 한우만 사먹는 부자들은 안전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서민들은 위험할 것이라는 인식은 촛불집회 참여 확률을 3배 가까이 높여놓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 사회적 위험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 둘째는 재난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언제든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 위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 무심코 먹은 음식에 미국산 소고기가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현실적 공포심 말이다.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앞으로는 인파가 몰리는 곳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재난의 경계선 바깥에 서게 된다. 재난이 정치화하기에는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다. 셋째는 참여자들의 네트워크 형성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프레임 공유와 조직화, 그리고 집합행동이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같은 학교 학생들이었던 세월호 참사와 달리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명단 공개는 네트워크 형성의 가능성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변수이다. 그러나 설사 이 세 번째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앞의 두 조건의 결여는 이번 비극이 정치화로 연결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음을 말해준다.

패륜과 애도라는 정치적 기획을 떠나 재난을 반복하지 않을 시스템 개선에 공을 들이는 것이 최선의 정치적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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