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서막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역사가들은 종종 ‘시대구분’은 필요악이라고 얘기한다. 세상과 사물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좀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우리가 익숙하던 경제나 비즈니스 환경의 기본 틀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 다시금 시대구분을 통해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궤적과 현재의 위치를 진단하여 불확실한 미래를 대면해야 할 시점이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특히 이번 복합위기는 이른바 경기 사이클에 기반한 여느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우리 경제 사상 최악의 악몽으로 기억되는 외환위기나 금융위기는 주로 금융시장의 패닉과 결부된 수요 붕괴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오히려 물리적 차원의 공급 위기에서 비롯된 성격이 강하다. 그런 만큼 위기가 끝나면 다시 회복을 기약할 수 있는 순환적 위기보다는 구조적, 추세적 위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매킨지는 최근의 혼란을 일종의 지진에 비유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오랜 기간 단층선에 쌓인 기저의 강력한 힘이 분출하면서 광범위한 지각개편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매킨지는 이러한 지각개편의 5가지 차원, 즉 글로벌 질서, 기술, 인구구조, 자원 및 에너지, 그리고 자본화(capitalization: 자본 심화 내지 축적 흐름)에 주목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를 3개의 시대로 구분한다.

우선, 2차 대전이라는 초대형 지진 이후의 ‘전후 붐’시대(Postwar Boom: 1944~1971년)이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도입되고 전후 부흥 노력이 본격화되면서 서방 위주의 세계경제는 폭발적 인구 증가와 함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물론 그 근저에는 미·소 냉전 심화와 제3세계의 낙후라는 그림자가 깔려 있다.

두 번째는 미국의 금태환 중지와 오일쇼크를 계기로 형성된 ‘분쟁의 시대’(Era of Contention: 1971~1989년)이다. 변동환율제 본격화와 자원 민족주의의 확산, 인플레이션 충격과 고강도 통화긴축, 생산성 둔화 등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 등 비서구 국가들이 약진하고, 동서 데탕트 시대의 개막과 닉슨의 중국 방문 등으로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도 한 시기였다. 아울러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시장의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어 세 번째로 ‘시장의 시대’(Era of Markets: 1989~2019년)가 도래했다. 구소련의 붕괴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사회주의권의 막대한 노동력을 세계시장에 공급했고, 월드와이드웹의 탄생은 디지털 혁명을 이끌었다. 금융화와 디지털화에 기반한 세계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세계경제의 번영과 수렴을 이끌었지만, 그 이면에는 국내 양극화와 부채 누증, 기후변화 등과 같은 단층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글로벌 투자, 불태환화폐(fiat money)와 통화팽창으로 뒷받침된 금융시스템은 한편에서는 역사상 기록적인 부채 규모, 다른 한편에서는 기록적인 자산가치평가라는 잠재적 취약성을 노정했다.

이제 새 시대가 도래하는 걸까? 글로벌 질서 차원에서 보면,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흔들리고 다극화, 지역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또 기술도 무어의 법칙으로 대표되는 반도체 성능 개선에 기반한 디지털 혁명이 성숙단계에 진입하면서 이제 응용 AI, 바이오, 가상현실과 같은 범용적 요소기술이 주목을 끈다. 인구 차원에서도 노령화와 도시화 및 불평등 심화가 이슈다. 자원 및 에너지도 기후변화에 초점을 맞춰 탄소절감 압력이 커지지만 동시에 자원 경쟁도 격화되고 있다. 나아가 자본화 차원에서도 경제의 성장잠재력은 둔화되는 한편, 방대한 부채의 하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처럼 변화의 방향은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지만, 그 승산은 불확실하다. 시장의 시대라는 비교적 평온한 시절이 끝나면서 앞날에 대한 불안도 크다. 또 지금과 유사성이 큰 분쟁의 시대처럼, 가치나 지향이 수렴되기보다는 발산하는 양상도 걱정이다. 하지만 “누구도 돌아가서 새 출발할 수는 없지만, 누구라도 지금 시작하면 새로운 결말을 만들 수 있다”는 매킨지의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복합위기에 직면해 시대 변화의 방향을 고민하고 그에 맞설 채비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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