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 시인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기적적으로 16강에 오른 우리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에 적은 글귀가 화제였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누군가는 ‘꺾이지 않는’보다는 ‘꺾지 않는’이면 어땠을까라고 말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언제나 풍전등화와 같은 것이니 ‘꺾이지 않는’이 더 실감 난다. 확실히 ‘꺾이지 않는’에는 누군가 혹은 무엇이 나를 꺾으려 한다는 현실이 숨어 있다. 그것에 굴하지 않고 처음 마음을 간절히 지키겠다는 것이 ‘꺾이지 않는’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아 뭉클하기도 했다. 이 뭉클함은,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꺾으려는 사람들이 여전하다는 것 때문에 드는 감정일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안전운임제의 연장과 확대를 요구한 화물노동자의 파업을 현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이 마치 영토를 침범한 적군처럼 대한 일이 있었다. 연이어 벌어진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반동적 행태나 장애인들을 대하는 비정한 태도도 마찬가지 예에 해당된다.

신동엽·김수영에 공통된 그 마음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사람의 마음은 숱하게 꺾이고 다시 고개를 드는 게 사실이지만, 내 마음이 지금 꺾였다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꺾였을 것이라는 판단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내 마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주관적인 심리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를 돌아봐도 그렇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25년 뒤에 다시 경천동지한 사건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에 대한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역사 그대로이다. ‘꺾인 마음’인 일부 부역자들 때문에 역사의 흐름도 꺾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대체로 경솔한 지식인들의 정신이다. 전쟁의 폐허를 발판 삼아 강고해진 이승만 반공 독재를 무너뜨린 것도 결국 ‘꺾이지 않는 마음’들이 면면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신동엽 시인은 4·19혁명의 뿌리를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잡았다. 이런 역사적 혜안을 그 당시에는 김수영도 갖지 못했다. 4·19혁명이 1년 뒤의 군사쿠데타로 뒤집히고, 그 뒤로 박정희와 그의 후예들이 장기 집권을 했지만, 그 체제도 결국 ‘꺾이지 않는 마음’들이 모여서 무너뜨렸고 여러 부침을 겪으며 몇 년 전에 우리 스스로가 촛불을 들고 그것을 다시 해내기도 했다. 박정희의 정신적 후예들이 우리 사회의 도처에 박고 있는 뿌리가 이렇게 깊은 줄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때 쏟아졌던 인면수심의 언어들이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자 다시 등장했을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든 반복된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가장 최근의 경험이기도 했다. 수치의 역사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꺾이지 않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촛불의 반복도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물론 그 형식과 시기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혁명의 하늘’은 꼭 다시 온다

김수영이 4·19혁명의 뿌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가 살아본 당대의 혁명에 ‘미쳐 날뛰느라’ 그랬을지도 모르고, 혁명의 퇴행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느라 숙고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 쿠바 혁명을 다룬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고 독후감을 남기기도 했다. 한 개인에게 모든 것을 감당케 하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동엽과 김수영은 각자 다른 정신적, 문학적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신동엽은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찾으려 했는 데 비해, 김수영은 그 또한 과거를 돌아봤지만, 대체로 인식의 외연을 넓혀 미래를 상상했다. 즉 김수영의 역사 인식은 자신이 살아본 혁명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새삼 돌아보면 신동엽과 김수영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도 바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사실 문학이라는 것은 이 ‘꺾이지 않는 마음’에 크게 좌우된다. 두 시인은 자신들의 문학적 영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는 시대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 그랬다는 점이 중요하고, 오늘날까지 두 시인의 작품이 살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서’ 같은 언어가 요즘에는 허언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위해서는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삶을 깊게 헤아려 보는 훈련이 도움이 된다. 살아 있는 존재를 망각한 미래는 생명 없는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청사진을 만들어 학습시키려 하는 것이야말로 ‘꼰대’의 발상일 텐데, 시급한 것은 기성세대가 먼저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일 게다.

김수영 혁명시의 높은 봉우리인 ‘사랑의 변주곡’은 아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끝난다. 여기에서 김수영이, 자신의 ‘예언’은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라고 확신하는 것은 여전히 ‘꺾이지 않는 마음’ 때문이다. 4·19혁명을 통해 살아봤던 ‘하늘’은 꼭 다시 온다는 그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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