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체념에서 구하소서

황규관 시인

시간이 해나 달 단위로 분절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과 문화가 그러하니 아무리 무심해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해 결심 같은 것에 그동안 약간 냉소적이었지만, 마냥 청춘이 아니다 보니 이제는 그게 그렇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주위에서 아픈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나 또한 세밑에 병원에 좀 갈 일이 있어서 새로운 삶의 실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자리와 그동안 쌓은 업 때문에라도 무슨 대단한 새해 계획이란 게 있기 힘들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는 것과 더 욕심이 있다면 체념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정도이다.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꿇리고 만들겠다는 듯 언어도단의 사태를 거의 매일 일으킨다. 대통령부터 유튜브 활동이 비즈니스인 극우 인사에 이르기까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데는 일가견들이 있는 것 같다. 입이야 잠시 닫고 살 수 있지만, 정말 기가 막혀서 체념의 마음이 굳어지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지난해 12월30일, 이태원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 낭독회 자리에서 당한 극우 인사들의 폭언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일단 현수막에 걸린 희생자와 가족에 대한 희롱과 능멸부터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가 아닌 언어에 대해서, 어떤 좋은 의도가 되었건 다시 옮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좋은 의도가 되받아치는 역설적인 결과에 자주 직면했지 않은가. 문제는 극우들이 뱉는 언어가 점점 더 그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통령을 포함한 현 집권 세력의 말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짓말이 ‘대놓고’ 참말 행세를 한 것은 이명박 때인데, 나는 나름의 경험이 있어 그 기원으로 조선일보를 떠올리고는 한다. 20년도 지난 일을 여기서 복기할 여유는 없지만 언어가 자기 이해관계에 휘둘려 조작되는 게 일상이 된 것을 보면 언어에 대한 고민이 많은 입장에서는 체념의 감정이 생기고는 한다.

그들 말은 인간 언어가 아니었다

자연을 조작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근대 과학과 철학의 시작이다. 여기서 ‘조작’은 사물을 단지 이용이 편리하게 다룬다는 차원을 넘어, 폭력적으로 전유하거나 필요하다면 점령해서 파괴해버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여성에게도 향해졌고 다른 나라나 민족을 식민화시키면서 극에 달했다. 그리고 이 식민주의는 여전히 근대 자본주의의 심부에서 번득이고 있다. 이 식민주의는 인류의 정신적, 지적 유산마저 그 대상으로 여기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언어의 타락이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이런 언어의 식민화 과정에 테크놀로지가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잘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테크놀로지의 기본 속성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불변자본’인데,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인간은 마치 그 자신이 언어의 형성자이자 지배자인 척 거드름을” 피우며, 언어가 “여전히 인간의 주인”임을 잊은 이 역전 관계는 오늘날 “인간의 본질을 섬뜩한 것 안으로 몰아넣고”(하이데거) 있다.

극단적인 현대 자본주의는 언어마저 상품으로 만들었고 언어가 상품이 된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이들은 바로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이다. 돈 많은 자본가가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듯이, 언어 상품으로 부와 인기를 얻은 이들이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까지 휘두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들이 생산한 언어가 정신을 좀먹는 자극적인 상품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도 그랬고, 추모시 낭독회 자리에도 유튜버들은 대거 출동했다. 수많은 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어떤 사전 양해도 없는) 촬영을 ‘당하면서’ 나는 누구에게 내 보잘것없는 시를 들려주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혹자들은 전통 언론이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유튜브 방송들에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하기도 하던데 설령 얼마간 긍정적인 역할이 있다손 치더라도 세상을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고 그 약효 또한 깊은 부작용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

이제 시의 책무는 언어의 파수

‘시의 마음’이 없는 것은 극우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고함소리와 폭언에만 시가 없는 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만으로 차갑게 반짝이는 카메라에게도 시는 없었다. 아무리 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언어를 지키는 마지막 파수의 역할마저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의 풍요든 물질의 풍요든, 풍요가 쓰레기를 거의 비례적으로 양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그것의 누적은 우리 삶을 사막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제 시의 책무는 언어를 지키는 파수이면서 동시에 우물을 파는 행동이 되는데, 체념의 늪에 빠지지 않을 때에만 시는 찰랑거리는 지하수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는 우리 영혼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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