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개성을 묻다

장대익 진화학자·과학철학자
[장대익의 에볼루션] 대학에 개성을 묻다

미네르바대학은 하버드대보다 입학이 힘든 글로벌 교육 맛집으로 성장했다
이제 모두가 하버드대나 서울대를 원하는 시대는 지났다
자신을 성장시켜줄 개성 있는 작은 대학이 더욱 선호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메뉴가 너무 많으면 맛집 가능성이 낮죠.” 얼마 전 중국음식의 달인 이연복 요리사가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맛집 감별법을 공개해 화제다. 물론 많은 메뉴로 승부하는 식당도 있다. 바쁜 일상에서 끼니를 빨리 해결하려고 가는 곳, 바로 분식점이다. 어떤 프랜차이즈 분식점 벽에는 무려 100개나 되는 메뉴가 빽빽하게 적혀 있다. 이들의 경쟁력은 다양한 메뉴의 빠른 제공이다.

장대익 진화학자·과학철학자

장대익 진화학자·과학철학자

그런데 세상의 모든 식당이 분식점뿐이라고 해보자. 삼겹살 파티를 하려는데 삼겹살 구이가 100개의 메뉴 중 하나라면? 기념일에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도 한·중·일 양식 메뉴를 다 하는 분식점밖에 없다면? 100가지 요리를 다 할 수 있다는 식당에서 음식의 깊은 맛과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을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왜 그럴까? 이어지는 이연복 요리사의 말이다. “메뉴가 많을수록 관리가 힘들어요. 맛집은 대개 적은 메뉴로 전문적으로 운영되는 곳이죠.” 미식가들에게는 냉면 맛집, 스시 맛집, 탕수육 맛집이 있는 것이지, 아시아 음식 맛집 따위는 없다. 각 음식의 고유한 풍미를 경험하게 하려면 그에 걸맞은 전문성과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감동적 경험이었다며 5점 만점에 재방문 의사를 표시하는 손님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얼마 전 세계 대학 순위 끌어올리기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국내 대학 당국들을 머쓱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의 한 전문 평가기관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 미국의 몇몇 대학이 선정 기준의 불합리함을 내세우며 참여 거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평가기관이 수십년째 진행해온 로스쿨 평가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반전은 이런 거부가 낮은 순위를 못마땅해하는 몇몇 하위권 대학의 볼멘소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항의의 진원지는 19년째 1위를 고수해온 예일대였다. 예일대 로스쿨 측은 성명서를 통해 “기존 순위 체계는 공익변호사를 맡은 졸업생을 실업자로 분류하고, 변호 봉사를 통한 학자금 대출 탕감 프로그램을 감점 처리하며, 저소득층 학생이 아닌 로스쿨 입학자격시험 고득점자에게 장학금을 줘야 더 유리하게끔 되어 있다”고 고발했다. 한마디로 기존 평가체계가 학교의 핵심 가치 및 인재상에 부합하지 않아서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개성 없으면 교육 맛집 될 수 없어

놀라운 것은 그동안 예일대 로스쿨과 치열한 1위 경쟁을 해왔던 하버드대 로스쿨도 이 보이콧에 동참했고(‘그러면 우리가 이제 1위구나’라고 좋아하지 않았다), 이어 상위 12개 대학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전미 로스쿨 1등’이 그들의 지상과제였다면 이런 거부 행렬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어떤 가치의 교육을 하고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진 법조인을 길러낼 것인지를 고민해왔기 때문에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순위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개성이 있는 대학’(자신의 교육 철학과 인재상에 근거하여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대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한 가지 모습이다.

사실, 개성이 없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 밋밋하고 존재감이 약하다. 마치 100가지 메뉴를 나열해 놓은 분식점처럼 말이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대학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학의 주체들을 감동시키기 힘들다. 표정이 없는 대학은 매력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에는 어떠한 개성들이 있을까? 세계의 대학 순위 평가 결과에 대한 국내 대학의 반응을 보면 대략 짐작이 된다. “이번에도 서울대가 50위권 밖이다. 100위권에 든 대학이 두 개밖에 없다….” 늘 이런 식이다. 몇 개의 평가업체가 그들만의 기준으로 전 세계 대학을 한 줄로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어떤 대학 당국도 저항하지 않고 있다. 예일대 로스쿨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담아내지 못하는 시스템이라 당신들의 리그에 동참할 수 없소”라고 주장하는 학교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대학 당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디어도 그 순위를 신줏단지 모시듯 수용하고 반응할 뿐(“아직도 국내 대학은 멀었지”), ‘왜 우리가 그들의 체계를 따라야 하는가’라고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현실을 모르는 소리다. 전 세계의 대학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데, 열심히 경쟁해서 따라가진 못할망정, 우리 수준에 무슨 평가 기준 자체를 의심하고 있느냐’라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오해 없으시기를. 지금 대학 평가 자체가 나쁘거나 무용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학 평가는 평준화에 도움이 된다. 비슷한 항목들에 대해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한다. 가령, 대학 교수의 연구를 어느 정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급 저널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썼으며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지를 따지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대학 평준화의 도구이지 대학의 개성을 만드는 일에는 도움이 안 된다. 평가 기준을 잘 따른다고 해서 표정이 있는 교실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안팎 지표 연동 없는 순위는 무의미

세계 대학 평가의 여러 기준들을 평균 이상으로 만족시키는 대학들이 국내에 20개 있다고 해보자. 이제 중요한 것은 같음이 아니라 차이다. 모두가 똑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집단이 재밌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듯이, 그 대학들이 모두 비슷한 얘기만 하고 있다면 학생·교수·사회의 입장에서도 그곳은 교육 맛집이 될 수 없다.

그러니 평가는 얼마든지 받으시라. 대신 각 대학은 자신만의 가치와 기준을 당당히 제시하고 개성 있는 학교가 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 설령 분식점이 맛집으로 등극하고자 해도 그 많은 메뉴 중에 몇 가지에만 집중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마찬가지로 맛집 대학도 남다른 핵심 가치와 인재상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개성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나는 ○○대학의 이런 면이 너무 맘에 들어 오래전부터 ○○대학의 신입생이 되려고 했어요”라는 팬심을 만날 수 있다.

학생·교수·사회의 관점에서 대학의 색깔이 훨씬 더 다양해지길 바란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이 내신이나 수능 점수에 맞춰 가는 방식이 아니라, 팬심으로 자신의 색깔에 맞는 대학을 선택하여 맞춤형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대로 하루속히 진화하길 바란다. 대학은 연구비 총액이나 논문 편수 같은 기준 말고, 입학 대비 졸업 시에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가와 같은 섬세한 기준들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좋겠다. 입학 성적이 아니라, 학생의 잠재력이 얼마나 다양하고 강력하게 발현되었는가로 더 좋은 대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왜 없는가?

외식업계의 대부인 백종원 대표도 말한다. “진정한 미식가는 가게에서 먹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어떤 메뉴를 시킬 건지 빨리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밥을 먹고 나가는 손님의 반응까지 살펴야 맛집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대학도 자신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진정으로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메뉴판이나 간판’ 같은 외적 지표뿐만 아니라 어떤 가치와 경험을 공유할 때 감동하고 변화하는지와 같은 내적 지표들에 민감해야 한다. 외적 평가 순위와 학생들의 내적 표정이 연동되지 않는다면 순위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고 반박하는 대학들이 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예일대이니 그런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지, 생존도 어려운 대학이 무슨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겠냐고 자조할 수도 있다. 더욱이 지난 14년째 대학 등록금이 동결된 초유의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겠냐며 좌절하는 대학도 많을 것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첫걸음은 개성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다.

미국 작은 도시의 작은 대학인 세인트존스 칼리지는 전교생에게 인문·자연과학의 고전 100권을 읽고 졸업하게끔 모든 커리큘럼을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색깔을 뽐내고 있다. 국내 학생들도 가고 싶은 외국 대학으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대학이 되었다. 캠퍼스 없이 전 세계 7개 도시를 이동하며 온라인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 프로젝트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 미네르바 대학은 하버드대보다 입학이 더 힘든 글로벌 교육 맛집으로 성장했다. 이제 모두가 하버드대나 서울대를 원하는 시대는 지났다. 자신을 성장시켜줄 개성 있는 작은 대학이 더 선호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학생들은 우리 대학들의 개성이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장대익

진화학자이며 과학철학자. 인간 본성과 기술의 진화를 연결시키는 연구와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 과학과 인문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 기술, 사회의 진화를 이야기해왔다.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가천대학교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윈의 식탁> <다윈의 정원> <울트라 소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종의 기원> <통섭>(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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