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시험하는 음악

신예슬 음악평론가

한동안 즉흥음악을 자주 들으러 다녔다. 그건 연주목록이 있는 공연을 보러 갈 때와는 다른 긴장감을 주는 일이었다. 빼곡한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화된 기억과 감각을 섬세히 살피며 음악을 만드는 일. 연습한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만 벌어질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처음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정말로 모르는 음악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었지만, 듣다 보니 즉흥연주에서도 나름의 패턴과 관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번 대단히 다른 것을 듣게 되지는 않았고, 긴장감도 조금은 덜해졌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하지만 즉흥음악 공연에서 결코 패턴화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음악가들이 음악을, 그리고 동료 음악가를 대하는 태도였다. 언젠가 봤던 즉흥 듀오는 그저 각자 하고 싶은 것을 동시에 연주했다. 둘은 가까이 있었지만 각자의 음역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어떤 즉흥 트리오는 각자 솔로 부분에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도록 시간을 공평히 나눈 듯했지만 한 사람은 마이크를 확 빼앗듯, 갑작스레 모두의 소리를 뒤덮었다. 네 사람이 함께했던 즉흥 합주에서 그들은 아주 엷은 소리만을 조심스레 주고받았고, 음악도 별일 없이 마무리됐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즉흥연주의 모델은 무엇일지 고민해봤지만,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언젠가 음악가 박창수는 즉흥 듀오의 이상적인 상황을 ‘비기기 위한 타이틀 매치’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서로를 상대하며 만들어내는 무대. 스포츠맨십에 준하는, ‘뮤지션십’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무대에서 발휘되어야 할 것 같았다. 박창수는 2019년에 24시간 동안 서로 다른 음악가들과 24번의 즉흥 합주를 했고, 그중 일부를 관람하며 나는 그가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듯 타인에게 끝없이 집중하는 태도를 볼 수 있었다. 24번의 타이틀 매치를 기꺼이 감행하는 마음은 무엇일지 생각하며, 나는 어쩌면 즉흥음악이라는 것은 관객에게 들려주기 위한, 바깥을 향하는 음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음악가의 안을 가리키는 음악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즉흥 합주가 비기기 위한 타이틀 매치라면 박창수에게 즉흥 독주는 무엇을 상대하는 일일까. 그는 2019년에도, 2023년 1월에도 ‘침묵을 자유롭게 하다’라는 이름으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다. 4년 전과 달리 올해는 짧은 합주를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공연의 핵심부에는 즉흥 독주가 놓여있었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조금 약해 보이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나아갈 건반을 찾고, 때론 음을 교정하듯 바꾸어 누르며, 멈추기도 했다. 일전에 들었던 확신에 찬 유창한 음악은 없었다. 나는 그가 종종 자신의 내부에서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험에 들기 위해 온 것 같다고 느꼈다. 그가 자신의 음악에 거는 기대가 관객이 즉흥음악에 거는 기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악기를 독대하고 계획 없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임이 분명했다. 그 또한 계획되지 않은, 예상범주를 넘어서는 음악을 만나기 위해 이 무대에 올라 이 모름의 상태를 견디는 것만 같았다. 내가 모르던 것을 듣는 시간이 아니라 음악가도 정말로 모르는 것을 함께 듣는 경험은 꽤 낯설었지만, 그것이 어쩌면 가장 솔직한 형태의 즉흥연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유독 어둠 속에서 배회하는 것 같았던 그 공연이 그 자신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생각할지도, 충분치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관객이었던 내게 그날 그 공연은 어떤 선명한 인상을 남겨두었는데, 그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손짓으로 가장하지 않은, 꾸밈없는 음악을 찾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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