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좋아하는 배우와 만났다. <재벌집 막내아들>에 출연한 김신록씨였다. 진행자가 그의 수상 소감인 “저는 연극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사유한다”를 언급했을 땐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출연자가 말했다. “이런 말은 대부분이 알아듣는 단어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사유라는 단어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김신록씨는 다음부터는 ‘생각한다’로 바꾸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사유하다’라는 단어를 많이 써왔다. 최근의 책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처지에서 깊이 사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 일은 없는 것 같아서, 생각과 사유는 어떻게 다른가, 하고 생각, 아니 사유하기 시작했다.
사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생각’이라는 단어를 최대한 쓰지 않을 것을 말해왔다. 무언가 무책임하게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다 보면 많은 문장의 마무리가 나는 생각했다, 생각했다, 생각했다, 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사유’라는 단어를 계속 쓰면 글의 분위기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고.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알맞은 단어를 찾는 일은 어렵다.
생각은 단편적이다. 상황에 따라 잠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편린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싫어한다, 너를 혐오한다, 하는. 그러나 사유는 한 사람의 세계다. 내가 너를 왜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너를 왜 싫어하고 혐오하는지, 거기에 이르는 명확한 체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생각을 거듭하고, 스스로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고, 치열하게 답해 나가는 동안 완성된 한 사람의 세계관이다.
다정한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를 사유로서 살핀다.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본다는 건 그의 세계를 섬세하게 살피는 일이다. 그래야 그를 이해하고, 그의 잘됨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굶주리는 누군가의 불쌍함에 공감하는 데서 나아가, 저러한 굶주림은 왜 시작되었는지를 묻는다든가 아니면 타인을 동정하는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핀다든가, 하는 것이다. 얼마 전 TV 다큐멘터리에서는 코발트광산에서 일하는 어린아이들을 봤다. 나는 나의 아이들을 불러 그것을 같이 시청했다. 그때부터는 그 아이들의 삶을 안타까워하는 데서 나아가, 나의 아이가 저기에 있다면 어떠할 것인가, 아니 내가 저기에 있다면 어떠할 것인가, 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김신록씨가 연극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사유한다고 한 건, 아마도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눈을 키우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에만 그친다면 그처럼 한 존재를 완벽히 연기하기란 아마 어려울 듯하다. 나는 그의 작품을 두어 편만 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대상을 깊이 이해하고 표현해냈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책을 한 권 만들었다. 저자의 자취를 따라가다가, 그가 2010년에 남긴 신춘문예 당선소감과 만났다. “나의 다른 이름인 ○○씨, 물푸레나무 그늘 아래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계절이 따뜻해져옵니다.” 그는 자신의 남편을 ‘나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그의 책을 만들면서 두어 번 울었는데, 그의 소감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나의 다른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정확히, 서로의 사유가 닮은 사이일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한 존재를 그렇게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배우 김신록씨의 삶도, 곧 자신의 에세이집을 출간할 강윤미 시인의 삶도,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그들이 계속 사유하며 또 자신과 사유가 닮은 사람들과 만나 행복할 수 있길. 나도 계속 사유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