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그 시절, 가정상비약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약 광고를 보았다. 오래된 약, 안티푸라민의 광고였다. 아니, 안티푸라민의 TV 광고가 있다니, 그것도 손흥민이 모델로 나오다니. 이 상황이 내겐 무척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3년 전부터 시작된 광고라고 한다. 어쨌든, 이 광고는 안티푸라민에 대한 나의 향수를 자극하고 말았다.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그 시절, 가정상비약

옛날 청소년 시절까지 나의 집엔 늘 안티푸라민이 있었다. 모기에게 물려도 그것을 발랐고, 타박상에도 그것을 발랐다. 피부나 소염에 관해선 안티푸라민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겼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어린 시절은 안티푸라민에 완전히 세뇌(?)당했던 모양이다.

옛날 안티푸라민 연고는 초록색의 둥글고 넓적한 철제 케이스 모양이었다. 거기 그려진 간호사의 얼굴. 디자인은 다소 촌스러웠지만 그 이미지는 선명하게 다가왔다. 철제 케이스의 표면은 미끈미끈했다.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면 연고가 케이스에 묻기 마련인데, 그로 인해 케이스 표면은 더 미끄러워지고 그래서 매번 뚜껑을 여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내 책상 옆엔 안티푸라민 연고가 두 통 놓여 있다. 2년 전인가, 약국에서 안티푸라민을 발견한 적이 있다. 잊혀진 안티푸라민이었는데 아직도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반가운 마음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안티푸라민을 산 것이다. 그때 구입한 안티푸라민의 케이스는 흰색의 플라스틱 재질로 바뀌어 있었다. 뚜껑은 돌려서 여닫는 트위스트 캡. 그렇지만 간호사가 그려진 뚜껑의 디자인은 변함이 없었다. 뚜껑을 여니 연두색 연고 특유의 향도 그대로였다. 굳이 바를 일이 없는데도 이따금씩 뚜껑을 열어 그 향을 맡아본다. 나만 이렇게 유별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본다.

안티푸라민은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1895~1971)이 1933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소염진통제다. 이후 가정 상비약 1호로 사랑받아왔다. 1980년대 초의 안티프라민 신문광고(사진)를 찾아보았다. ‘타박상. 허리나 어깨와 팔이 쑤시고 담에 결리는 데도…’ ‘운동 전후 근육통에!/ 발라서 상쾌한 가정 상비약’ ‘운동 전후, 타박상, 근육통, 삔 데, 멍든 데 피부 깊숙이 침투하는 찜질효과’ 등등.

원래는 관절염, 신경통, 근육통 등의 완화를 위해 개발됐지만 사람들은 폭넓게 사용했다. 벌레에게 물렸을 때도 안티푸라민을 발랐고, 막힌 코를 뚫으려 인중에 안티푸라민을 바르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가정 상비약 1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안티푸라민은 특정 제약회사의 상품이기 이전에 보통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이 대목에서 ‘이명래고약’도 ‘용각산’도 떠오른다. 어린 시절 이명래고약을 자주 사용했다. 시커먼 고약을 종기 위에 붙여놓고 하룻밤 지나면 누런 고름이 쫙 빨려 나왔다. 다소 징그러웠지만 참 신기했다. 나의 아버지는 진해거담제 ‘용각산’을 종종 드셨다. 박하향 비슷한 특유의 냄새. 뽀얗고 미세한 분말. 광고 문구가 생각난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 시절, 참 멋진 카피라고 생각했는데. 이명래고약도, 용각산도 우리집 상비약이었다. 이런저런 부침이 있었겠지만 이명래고약과 용각산은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이명래고약은 서울미래유산이기도 하다.

안티푸라민이 탄생 90년을 맞았다. 알고 보니, 안티푸라민은 1990년대 말부터 변신을 거듭해왔다고 한다. 다양한 버전의 안티푸라민이 출시되었고, 손흥민까지 광고에 가세했다. 이렇게 한 세기를 지나온 가정 상비약.

요즘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거기엔 우리네 애환이 담겨 있다. 이명래고약도, 용각산도 마찬가지다. 100년을 넘어 더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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