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청동투구의 재발견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그리스 청동투구의 재발견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실에 가면 특이한 이력의 문화재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들고 그리스 땅에 묻혀 있다 1936년 독일로 건너간 뒤 1986년 한국 땅으로 넘어온 유물.

그리스인, 독일인,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과 한국인으로 소장자가 바뀐 유물. ‘그리스 고대 청동투구’(사진)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6년,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 유물을 부상으로 주는 관행이 있었다. 마라톤이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올림픽에선 그리스의 브라디니 신문사가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기원전 6세기)를 부상으로 내놓았다. 1875년 독일 고고학자들이 올림피아에서 발굴한 것이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아마추어 선수에겐 메달 이외에 어떠한 부상도 줄 수 없다”며 손기정에게 투구를 전달하지 않았다. 손기정은 이런 정황을 알지 못했다. 일본 측이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강력하게 요구했다면 청동투구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일제는 관심이 없었다. 식민지 조선의 비애였다.

그 후 청동투구의 존재는 잊혀졌다. 그러던 1975년 손기정은 우연히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그 청동투구는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었다. 샤를로텐부르크는 베를린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이 위치했던 곳. 손기정은 대한올림픽위원회 등과 함께 반환을 요청했다. 독일 측은 반환을 거부했다. 다만, 복제품을 돌려줄 수는 있다고 했다. 손기정은 진품을 반환받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들은 그리스 브라디니 신문사와 그리스올림픽위원회가 반환 촉구 대열에 합류했다. 반환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독일 측을 압박했다. 청동투구를 내놓은 그리스가 나서자 독일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전방위 노력 끝에 1986년 투구는 손기정의 품에 안겼다. 손기정이 우승한 지 50년 만이었다. 이듬해 문화재청은 이 청동투구를 보물로 지정했고, 1994년 손기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현재 기증실을 전면 개편하고 있다. 관람 동선에 따라 인트로 공간을 새로 조성하고 바로 옆에 영상실을 만들었다. 이곳을 지나면 곧바로 독립된 전시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 청동투구를 배치했다. 이 투구는 예전에도 기증실에 전시됐었지만 이번 개편을 통해 좀 더 전진배치하면서 그 존재감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식민지 청년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우리 근대기 스포츠 분야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순간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손기정의 투구도 그에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어찌 보면 참으로 절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손기정과 청동투구의 만남은 운명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여한 그리스 병사 페이디피데스는 그리스의 승전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40㎞를 숨가쁘게 달렸다. 아테네에 도착해 “우리가 이겼다”고 외친 뒤 그는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936년 조선의 식민지 청년 손기정은 베를린의 그루네발트 숲을 달렸다. 그건 민족자존의 문제였고 끝내 그는 식민지 조국에 우승을 바쳤다. 영광이었지만 손기정은 눈물을 더 많이 흘려야 했다.

이 청동투구를 보고 있노라면 2000년의 시차를 둔 두 청춘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을 아련하게 적셔놓는다. 이건 분명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유물이지만 내게는 너무 매력적인 우리의 근대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몇달 전에도 이 코너에서 손기정의 마라톤 연습코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또다시 손기정 관련 내용을 다루는 것은 청동투구의 감동이 너무나 벅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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