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행동하는 주주들

A사는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유제품을 만들어 파는 회사이다. 오랫동안 영업을 잘해온 우량 기업이었고, 주가도 한때 116만원까지 상승해 황제주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좋았던 회사가 10여년 전부터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리점에 대한 갑질과 고객 개인정보 유출, 오너 일가의 회삿돈 유용 의혹이 잇따라 터져나오다가 급기야 자사 제품이 코로나19 억제 효과가 있다는 허위과장 광고를 했다가 치명타를 맞았다.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돌출된 스캔들이라 더욱 큰 공분을 샀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영업실적도 추세적으로 악화됐다. 2022년까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최근 10년 동안 자기자본이익률(ROE)은 평균 -1.6%였다. A사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부(富)를 파괴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은행에 예금을 해도 부가 조금이라도 증식되는데, 장기간의 기업 활동이 결과적으로 부를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본 이들은 누구일까? 소비자는 다른 대체 상품을 선택했기에 피해를 봤다고 보기는 어렵고, 경쟁사는 반사이익을 누렸다. 주주들이 손해를 봤다.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던 지배주주들은 평판 추락과 실적 악화의 원인 제공자였기 때문에 할 말이 없을 테고, 불특정 다수의 소액주주들이 온갖 스캔들의 불똥을 맞았다.

A사는 최근 10년의 실적은 안 좋았지만, 과거에 오랫동안 영업을 잘해왔으므로 회사에 쌓여 있는 자산 규모는 크다. A사의 부채는 1600조원대이지만, 자기자본은 7300억원대에 이른다. 부채에 대해 이자를 내고, 만기 때 갚을 돈은 있기 때문에 A사 채권자의 부가 파괴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주주의 몫인 자기자본의 가치는 지난 10년처럼 엉망으로 경영하면 궁극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주주행동주의 단기성은 경계해야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은 두 가지가 있다. 적극적 대안은 경영진을 바꾸는 것이다. 10년 동안 헛발질을 해왔다면 기존 경영진의 무능은 충분히 입증됐다. 실제로 A사는 한 사모펀드에 매각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소극적 대안은 배당을 늘리는 것이다. 낮은 ROE를 내는 기업이 배당을 적게 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적 효율성을 해치는 행위이다. 경제적 자원이 수익성이 낮은 분야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정 배당을 실시하면 사외로 유출된 자본이 수익성이 더 높은 분야에 투자될 수 있고, 배당은 자기자본 규모를 줄여 해당 기업의 ROE를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특정 기업의 사례를 이야기했지만, 장기간 부를 파괴하거나, ROE가 극히 낮아 부를 효율적으로 증식시키지 못하는 기업들이 많다면 국가 전체적인 자원 배분이 잘못돼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부를 증식시키지 못하는 기업이 경제적 자원을 쥐고 있기보다는 다른 생산적인 부문으로 돌려지면 국가 경제 전반의 효율이 높아질 수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내각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졌다.

2012년 집권한 아베의 경제정책, 이른바 ‘아베노믹스’는 장기간 정체돼 있던 일본 경제를 깨우기 위한 일종의 모르핀이었다. 집권 초기 일본은행(BOJ)의 적극적 양적완화와 엔화 약세 유도, 공격적 재정지출, 거시적 구조조정 등을 축으로 한 ‘세 가지 화살’ 정책을 썼고, 2014년부터는 이토 모토시게 도쿄대 교수가 저술한 ‘이토 리포트’가 거시적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각론으로 제시됐다. ‘이토 리포트’에는 주주권 강화를 통한 지배구조 개선이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능력 없는 지배주주·경영진이 경제적 자원을 움켜쥐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후 일본에서는 주주행동주의가 활성화됐다. 2014년 7개에 불과했던 일본 내 주주행동주의 펀드 수가 2020년엔 44개까지 늘어났다. 일본 상장사들의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규모도 늘고 있어 일본 주식시장에서는 나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주주권 강화가 절대적 선은 아니다.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사고파는 주주들의 시야는 ‘단기’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통시장에서 주식을 매수한 주주들의 주식 보유 기간이 극단적으로 짧아지는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의 경영은 긴 호흡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쉽게 주식을 사고파는 주주들에게 휘둘리면 장기적 기업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주주행동주의에 대한 관심 커져

삼성전자의 배당에 대해 생각해보자.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주주환원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있다. 상장사로서 주주를 배려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지만, 사회 전반의 경제적 효율과 장기적 주주가치 제고라는 관점에서는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은 배당을 늘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최근 10년 삼성전자의 ROE는 평균 16.9%에 달했다.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경제 상황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부를 증식시켜왔다고 볼 수 있다. ROE가 높은 기업은 배당을 통해 경제적 자원을 사외로 유출시키는 것보다 자본을 재투자해 이익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경제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배당으로 유출된 자본이 16.9% 이상의 증식을 이루기는 평균적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주주 입장에서는 ‘먼 미래에 높아질 기업가치’보다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을 선호할 수도 있겠지만, 2020년처럼 특별배당을 실시해 삼성전자 당기순이익의 77%를 배당에 쓰는 행동은 과했다. 반도체 산업이 주기적인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래저래 우리 증시에서도 주주행동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주주자본주의에 내재된 단기성은 경계해야겠지만, 한국 증시의 풍토에서는 주주행동주의의 순기능이 더 큰 게 아닌가 싶다. 기업에 쌓여 있는 자산은 많은데, ROE는 낮고, 주주환원에는 소극적인 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다수 기업처럼 벌어들이는 이익보다 더 큰 규모의 주주환원을 하는 행태는 주주자본주의 과잉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은 주주자본주의 결핍에 따른 소액주주의 피해와 경제 전반의 비효율적 자원 배분에서 비롯되는 폐해가 더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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