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받는 밥상, 지켜내는 밥상

문주영 전국사회부장

최근 장을 보다가 농산물 가격에 깜짝 놀랐다. 200g 시금치 한 봉지가 8000원을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100g당 4000원대로 외국산 쇠고기보다 비쌌다. 올해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면서 농민들 표현대로 시금치가 ‘녹아내린’ 탓이다. 시금치만이 아니었다. 체감상 작년보다 샤인머스캣·복숭아 등은 50% 이상, 사과는 2배 이상 오르는 등 전반적으로 야채·과일 가격의 변동이 심했다. 이는 같은 비용을 지불해도 예년보다 질 낮은 밥상을 차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주영 전국사회부장

문주영 전국사회부장

기후변화로 위협받는 밥상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미국에선 대표적인 매운 소스인 스리랏차 소스가 품귀현상을 빚으며 가격이 10배까지 폭등했다. 가뭄으로 할라페뇨 고추 생산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도 올해 가뭄과 폭염이 반복돼 올리브 생산량이 크게 줄면서 가격이 폭등, 현지 슈퍼마켓에선 올리브유 도난사고까지 발생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의 위기가 생산자를 넘어 이제는 소비자에게도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농업의 관련 피해는 이미 심각하다. 통상 그 피해가 겨울 한파와 여름 폭염에 국한됐던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4월 냉해, 5월 호우, 6월 우박, 7월 극한호우, 8월 태풍, 9월 폭염 등 거의 매달 기후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배·사과 등의 열매와 잎이 검붉게 말라죽는 과수화상병과 같은 식물 전염병도 끊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에너지·비료 등 생산비가 폭등하는 가운데 농업재해가 다양한 형태로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심화되는 위기 속에서 농민들은 기후 변화에 따른 보상 기준을 현실화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농업의 공공성을 인정한다면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와 경영상 손실분도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하라는 것이다. 기존 농어업재해대책법 등에 따른 보상은 피해 인정기준이 까다롭고 보상 금액이 시설복구·생계비 지원 정도에 그치는 데다 이마저도 지급되기까지 오래 걸리는 탓이다. 실제로 지난 4월 발생한 냉해 피해 보상금은 이달 들어서야 지급되고 있다고 한다.

농업은 기후변화의 피해자이나 동시에 주범으로도 인식된다. 축산 과정에서 나오는 메탄과 아산화질소 때문이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28배, 아산화질소는 265배 더 심하게 지구를 덥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에선 지난해 가축의 사육두수를 줄이기 위해 농장폐쇄를 단행했고, 뉴질랜드는 2025년부터 농업 분야의 탄소 배출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하는 등 강력한 규제에 나섰다. 국내에선 농민들의 반발을 야기하는 규제보다는 농업 방식을 저탄소 구조로 바꾸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관련 기술 개발과 정책 시행 등 구체적인 로드맵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민들이 생산량 감소를 무릅쓰면서 자발적으로 저탄소 농법을 하기란 쉽지 않다. 탄소중립을 위한 농업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농업환경 보전에 대한 인센티브가 어떤 식으로든 확대돼야 할 것이다.

더불어 소비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소비자의 구매 행태가 변하면 농민들이 변하고, 정부 움직임도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농업 전문가는 “국내에서 저탄소 농법 보급이 더딘 데는 소비자들이 관련 농산물을 잘 찾지 않는 데도 원인이 있다. 소비가 있다면 농민들은 하지 말라고 해도 관련 농법을 저절로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기후재앙을 피하는 해결책이라는 빌 게이츠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선 기술혁신과 정치적·경제적 해결책, 그리고 소비자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대안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내주는 것이야말로 소비자로서 기후변화를 막는 적극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가령 내연기관 자동차를 전기차로 바꾸고, 백열전구 대신 LED를 구매하고, 로컬푸드 및 저탄소인증 농산물·인공고기 등을 사먹는 일은 농업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도시민들이 미래의 밥상을 지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더운 7~8월을 보내며 지구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지키기 위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붕괴가 시작됐다”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의 경고가 더 이상 허투루 들리지 않는 요즘 그 누구라도 뭐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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