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를 만들 수 없을까

베버리지가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라는 이름의 보고서(베버리지 보고서)를 발표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12월이었다. 전쟁 와중에도 이 보고서가 간행돼 판매된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 시민들은 1.6㎞나 줄을 서서 보고서를 샀다.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보고서는 6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전쟁의 비극이 진행 중이던 때, 전쟁 이후를 기약할 수 없는 그 시점에 베버리지는 “전쟁이 모든 종류의 역사적 유적을 파괴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어떤 제약도 없이 경험을 활용할 기회이다. 세계 역사에서 혁명적인 순간은 부분적 보수가 아닌 혁명을 위한 때이다”라면서 사회복지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혔다.

베버리지는 자유주의자였고, 사회주의자들과도 교류했던 인물이다. 우리식 이념 성향으로 분리해보자면 보수에 가깝다. 영국의 전쟁 영웅 처칠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현대 복지국가의 이상을 표현한 말을 만든 사람이지만, 정작 이 보고서는 싫어했다. 재정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 등으로 보고서를 반대했고, 베버리지의 면담 요청도 거절했다. 1945년 7월 치른 총선에서 전쟁 영웅인 처칠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총선은 베버리지 보고서의 사회복지 구상을 전적으로 수용한 노동당의 압승으로 귀결됐다. 자유당 후보로 출마한 베버리지도 낙마했다.

우리 정치에 그런 건 기대 난망

베버리지 보고서는 지난해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보고서가 처음 발표되고 80년이나 지나서다. 한국어로 번역된 보고서는 지금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현실 진단과 대안을 제시한다. 보고서가 현실에 적용돼 국가의 비전으로 수용될 수 있게 된 데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역할이 컸다. 케인스는 보고서가 실현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수정안을 제시했고, 베버리지는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면서 영국에 사회복지제도가 자리 잡게 됐다.

베버리지는 보고서에서 ‘사회의 5대 거악(巨惡)’을 ‘무지·불결·질병·나태·궁핍’으로 보았으며, 사회보장의 궁극적 목적을 ‘궁핍의 해소’로 잡았다. 그가 궁핍의 해소를 궁극적인 방향으로 잡은 것은 인상 깊은 대목이다. 세계인권선언에도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함께 ‘궁핍으로부터의 자유’가 현대 인권의 목표로 제시돼 있는 것과 연결돼 있다. 4대 자유는 이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미국 의회 연설에서 밝힌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시점에 궁핍의 해소는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로 승인돼 있었다.

베버리지는 권고안을 만들면서 ‘종합적, 보편적, 기여, 자산조사 반대, 의무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원칙은 ‘자산조사 반대’다. 자산이나 소득의 유무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배제되는 사람 없이 모두에게 사회보장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전쟁에서 싸우던 영국 청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보고서 하나 만들 수 있을까? 정쟁에만 골몰하고 있는 정당들에 기대할 수도 없고, 철 지난 이념전쟁으로 국민 분열을 통한 자기 세력 강화만을 꾀하는 윤석열 정부에도 기대할 수 없다. 이 칼럼을 쓰면서 정당들의 사이트를 뒤져 보니 미래의 정책대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기 힘들었다. 단편적인 정책이거나 상대당을 비난하는 브리핑 자료들만 즐비하다. 그래도 예전에는 민주노동당의 무상급식 같은 시대적 과제를 집약한 정책대안이 있었는데 말이다.

총선 전 시민사회서 만들면 어떨까

한국 사회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압축소멸 사회’ ‘과도불안 사회’라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불평등의 심화, 그로 인한 부동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의 자살률과 중대재해율, 인적 재난과 기후위기가 겹친 복합재난에 의해 가중되는 위험,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일자리 감소, 자유무역주의 퇴조와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으로 인해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고 있다.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는데 대전환은 못하고 도리어 정치는 퇴행한다.

22대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총선 전에 시민사회에서부터 ‘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을 착수하면 어떨까? 전쟁 중에도 미래를 위해 준비했던 베버리지의 열정이 한국 시민사회에 요구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때일수록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모아가야 한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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