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 혐오’가 ‘정치 개혁’을 죽인다

[강준만의 화이부동] ‘양비론 혐오’가 ‘정치 개혁’을 죽인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으로 패배한 쪽의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피바람 광풍을 여러 차례 겪었던 율곡은 나라가 망하겠다 싶어 양시·양비론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주변의 비난과 조롱만 받았다. 조선이 율곡이 죽은 지 8년 만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재앙에 처하게 된 건 오직 ‘반대편 죽이기’에 국력을 탕진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양비론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지금도 여전하다. 포털에서 ‘양비론’을 검색해보시라. 압도적으로 양비론에 대해 비판적 기사들이 많다. 기사 댓글의 거친 표현까지 감안하면 ‘양비론 혐오’가 흘러넘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진보 논객들의 대표적인 양비론 비판 4개만 감상해보자.

양비론 자체에 대한 비판은 무의미

①양비론은 진영논리보다 더 해악이 크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어느 한쪽이 잘못했다면 그쪽을 비판해야 한다. 그게 시시비비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언론은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성한용, 2015년 12월)

②지금 수구세력의 작태는 정치 혐오증을 유발한다. 무책임한 언론은 중립을 가장해 양비론을 펼친다. 이들 세력 간의 암묵적인 협업은 궁극적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다수의 국민들에게 정치를 외면하게 하고 무관심에 빠지게 한다.(이황석, 2019년 5월2일)

③양비론은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공정성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흔히 사용하는 논조이지만 실은 본연의 책임을 회피하는 교묘한 기회주의이다. 어느 한쪽을 지지했다가 받을 수 있는 비난을 의식한 ‘균형감’이다.(김창수, 2021년 1월6일)

④이재명과 윤석열 당에 차이가 없다? … 여야 싸잡은 비난이 ‘지식인 사회’에 유행이다. 정치가 난장판이란다. 진영 논리를 너도나도 개탄한다. 과연 그런가. 시시비비 없는 양비론이 ‘중립’ 또는 ‘진보’일까. ‘이재명 죽이기’에 혈안인 조선을 비롯한 신방복합체들의 여론몰이를 견제해야 할 신문마저 쉬 납득하기 어려운 기사를 내보냈다.(손석춘, 2023년 10월10일)

진보 쪽의 양비론 비판이 더 많긴 하지만, 보수 쪽의 양비론 비판도 4개만 감상해보자.

⑤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논객들 중에는 점잖게 양비론을 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시국이 분명 심하게 좌측으로 기울었는데도 위기의식을 못 느낀다면 고장 난 수평계처럼 상황판단 능력을 상실한 것이고,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거라면 이권이나 보신을 위해서 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있는 것이다.(김병래, 2020년 2월6일)

⑥중간파 매체들의 기회주의 양비론은, 그들 집단의 사적(私的) 이익을 위한 처세법이다. 예컨대, “MBC도 잘못했지만, 윤석열 대통령도 잘한 건 아니다” 따위의 양비론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우리는 힘세. 우리 말 들으면 도와줄 수도” 하는 몸값 올리기와 흥정도 내포한다. 이 흥정에 낚이지 않아야 한다.(류근일, 2022년 11월20일)

⑦무책임한 양비론에 빠져 이승만과 김일성을 비슷한 수준의 독재자로 배치하는 건, 그것 자체가 본질을 흐리는 사악한 구도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이들에겐 이런 구도를 그리는 것 자체가 이미 성공이다.(김은구, 2023년 9월6일)

⑧구속영장 기각 이후 사회적 분위기에 변화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언론이 민감하다. … 검찰이 무리한 수사와 내용 빈약한 구속영장 청구로 상황을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보태기 시작했다. 정권 측 비판에 더 힘을 싣는 인상이다. 양시·양비론만큼 편리한 도피처도 달리 없다.(이진곤, 2023년 10월2일)

이 8개의 주장은 전체 내용과 비판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각 비판의 개별적 상황을 최대한 감안하자는 걸 강조하고 싶다. 내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점은 양비론을 비판하면서 양비론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싸잡아’ 하는 비판을 답습하는 것이다.

양비론은 그 내용과 맥락을 따져야지 양비론 자체에 대한 비판은 무의미하다. 양비론을 펴선 안 될 사건이나 상황이 있는가 하면 양비론이 필요하거나 불가피한 사건이나 상황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의 양비론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개별적 비판을 해야지, 모든 양비론은 문제란 식으로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

양자택일 강요로 적대적 공생 보호

중도파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되고자 할 때에 거대 양당에 대해 양비론을 펴는 건 불가피하거니와 정당하다. 이의가 있다면 그 비판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비판을 해야지 ‘양비론’이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하는 건 옳지 않다. 혹 비판자가 양당제 정치의 신봉자라면 양당제가 다당제보다 나은 이유를 역설하는 게 옳지, 양비론에 대해 대중의 혐오를 유발할 수 있는 부정적 어감의 단어들을 동원해가면서까지 비난하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선 무조건적인 ‘양비론 비판’이 절대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정당한 양비론마저 부정적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만드는 효과를 내 사실상 양자택일의 진영논리를 강요함으로써 두 거대 정당의 ‘적대적 공생’ 체제를 보호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개혁이란 기존 판을 뒤흔들어야 가능한 것임을 감안할 때에 그런 식의 비판은 의도치 않게 정치 개혁의 가능성마저 죽이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무조건적인 ‘양비론 비판자’는 이념이나 정책의 콘텐츠 중심적인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비판 대상으로 삼는 정당들의 이념이나 정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비판해야지 대안 제시 없이 양비론을 구사하는 건 무책임하거나 기회주의적이라는 논지다. 이건 정당들이 자신들이 내세운 이념이나 정책을 실천하는 언행일치에 충실하거나 내로남불을 저지르지 않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비판이다.

한국의 거대 정당들은 ‘부족주의 정당’이다. 편의상 ‘진보’와 ‘보수’로 나눠 부르긴 하지만, 이 딱지는 엉터리에 가깝다. 늘 ‘토착왜구’를 외쳐대는 사이비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걸 최대의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면서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을 한국 이외에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서민의 재산이 사실상 대대적으로 약탈당한 참사를 일으킨 정권이 진보 정권이었다는 건 심하지 않은가? 진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윤석열 정권이 시대착오적인 ‘극우 놀이’를 해대는 자해극을 벌였겠는가?

양비론을 비판하더라도 대중이 정치에 분노하는 지점을 정확히 읽고 나서 비판하면 좋겠다. 대중이 가장 분노하는 건 정당과 정치인의 행태다. 독선과 오만, 내로남불, 후안무치, 편법, 성찰 부재 등과 같은 행태를 역겨워 하는 것이다. 중도파 유권자들은 문재인 정권의 그런 점이 역겨워 윤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랬더니 윤 정권은 그런 역겨운 행태의 극단을 치닫는 걸로 보답하는 희대의 배은망덕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국민일보 편집인 신종수가 지난해 11월 ‘합리적 중도층을 양비론에 빠지게 하는 여야’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여야가 각기 강성 지지자들만 바라보며 패싸움을 벌이는데 양쪽을 다 나무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대해 어떤 반론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요즘 대통령실 내에서는 대통령이 좋아할 만한 보고만 한다고 한다. 대통령 성미에 맞지 않거나 화를 낼 것 같은 얘기는 참모들이 한마디도 꺼내지도 못하는 분위기가 됐다는 얘기가 들린다. 야당은 어떤가. 누가 이재명 대표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내부 총질을 한다며 개딸들이 좌표를 찍고 문자폭탄을 보낸다. 강성 지지자들은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검수완박 같은 정책을 관철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등 아예 권력화됐다.”

무조건적인 ‘양비론 비판’이 많아진 이유는 인터넷, 소셜미디어, 유튜브 등으로 특정한 정치적 시각에 심취한 수용자들이 신문과 같은 전통적 미디어에 가하는 압박이 강해진 탓이다. 진보 언론에서 바람직한 균형을 취한 기사엔 거의 예외 없이 “경향 아니랄까봐 끝에는 민주당 까는 양비론”이라는 식의 비판적 댓글이 달리곤 한다. 제발 그러지 말자. 윤 정권의 탄생은 진보 언론이 문 정권을 제대로 까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금 윤 정권이 휘청이는 건 보수 언론이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제대로 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말자.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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