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지나간 자리, 경쟁 피로와 상처

수능 결과가 발표되었다. 국어, 영어, 수학과 여러 탐구 과목 중 이번에는 어렵지 않은 과목이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수능에서 킬러문항을 없앤다고 하여 기대는 컸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험은 어느 때보다 어려웠고 ‘킬’당한 학생들은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영어는 절대평가제 도입 이후 1·2등급을 받은 학생 비율이 역대 최저이다. 이번 시험으로 아이를 한국에서 낳고 교육시키는 보통 부모들이 사교육으로부터 정말 멀어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수능이 어려워져 사교육에 더 매달리게 되지 않겠냐는 질문에 당국은 사교육은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니, 사교육 문제를 풀어나갈 의지가 없던 것이라면 킬러문항을 없애자는 얘기는 도대체 왜 꺼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시작과 끝이 왜 이리 다른가?

어려운 전투 치른 수험생들은 아직 많이 지쳐 있을 터이다. 생애 처음 큰 시험을 보고 전국 단위로 비교되는 성적표에서 아이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경험했을 테니 말이다. 한참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했지만 이 피라미드는 예년보다 한층 오르기 어려운 미끌거리는 유리 피라미드였다. 매 시간 발을 헛디디고 미끄러지면서도 잘 버텨낸 아이들이 대견할 뿐이다. 이제 지친 아이들이 잘 회복되어 그 나이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본다. 앞으로의 삶에서 맞닥뜨릴 많은 실패와 성취를 반복할라치면 우선 이 전투의 상처에서 충분히 회복될 필요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해방과 회복이 아이들의 몫이라면, 수능이란 것이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서 어른이 해야 할 일은 달라야 한다. 시스템을 만들어낸 우리는 아이들이 성인으로 진입하는 초입에서 매번 이런 유리 피라미드를 경험하도록 그대로 놔둘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토록 저출생 문제를 고민한다고 말하고 청년과 미래 세대의 행복을 외치면서도 정작 우리는 아이들을 짓누르는 이 체계를 좀 더 가볍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 수직의 점수 피라미드를 사회 구조의 예고편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선택지는 너무 좁다. 각자 모든 것을 참고 부담을 감내하거나, 아니면 탈주를 도모하거나…. 그렇다면 각자의 마음은 체념과 미움으로 점철되기 쉽다.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피라미드 속의 한 점에서 확인하기보다는 너른 평원 위의 선으로 그려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삶이란 것이 수직 구조물의 어느 지점에 끼어들어가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각자 원하는 곳으로 멀리 달려나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래야 체념과 미움 대신 여유와 다정함이 그 자리를 채울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력을 짓누르지 않는 대안적 평가와 배치 방식을 고민하고 기획해야 한다. 그것이 어른의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n수생은 더 쌓이고 유리 피라미드는 한층 가파르고 미끄러워진다. 이번 수능은 사회에 점철된 경쟁 피로의 시발점 중 하나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교육 자원과 기회를 분배하는 데 대안적 접근이 필요하다. 온 사회가 경쟁 피로로 점철되고, 극단적 저출생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 후라면 너무 늦는다.

경쟁 피로가 극심한 와중에 사교육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라 말한다면 국가의 사회정책이란 왜 존재하는지 다시 짚어 볼 일이다. 개인이 자유롭고 행복을 유보하지 않을 수 있어야 혁신이 이루어지는 역동적 사회가 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교육정책은 여전히 지난 세기의 관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닌지….

3월에 내가 대학에서 맞이하는 아이들은 힘든 과정을 겪어내고 다시 맑은 얼굴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수능 이후 여러 갈래의 길을 가는 모든 아이들에게 사회를 제대로 바꿔내지 못한 어른으로서 미안함과 존경을 보낸다. 다른 사회를 만들어야 할 부채감도 함께.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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