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 흔들리는 세계

김민하 정치평론가

뉴스와 정치를 평론하는 걸로 먹고살지만 쉴 때는 보통 게임을 한다. 그러다보니 ‘집게손’ 논란을 보면서도 오늘날의 대의 정치를 연상하게 된다. 경향신문의 연속 보도로 ‘집게손’ 논란에 불을 지핀 일부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무리라는 게 드러났다. ‘범인’으로 지목된 인사와 실제 문제가 되는 장면을 그린 애니메이터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음모론의 특성상 주장과 반론, 의혹 제기는 당분간 계속 꼬리를 물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이다. ‘범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프레임 단위로 쪼개서 확인하지 않으면 발견하기도 어렵고, 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도 달라 의미도 불명확한 ‘집게손’을 ‘몰래’ 영상에 넣어서 얻을 이득이라는 게 과연 있겠는가?

‘범인’이 아닌 ‘형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최근 사태의 의문이 풀린다. 굳이 ‘범인’을 찾아내 지키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이들 생각에 최근 서구 게임 산업은 페미니즘에 의해 침공당하고 있다. 거친 외양에 노출 없는 복식을 갖춘 여성 캐릭터 묘사나 여성의 독립적 자아실현과 같은 서사가 늘어난 것은 이 결과다. ‘형사들’은 이런 조류로부터 정형화된 남성 중심 취향에 맞춰 제작된 여성 캐릭터들을 지켜내야만 한다. ‘집게손’ 논란은 그러한 싸움을 한반도에서 재현하려는 제스처이다.

서구 게임 산업이 페미니즘 선동가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주장은 진실일까? 돈 버는 게 지상과제인 거대 게임 회사들이 그럴 리는 없다. 그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할 뿐이다. 가령 그간 소홀했던 시장 영역 중 ‘동물의 숲’과 같은 게임이 접근하기 어려운 데에서 치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일부 이용자들의 ‘페미니즘 침공 세계관’은 이런 점에서 탈진실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국내 게임회사 넥슨이 발빠르게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이를 기회로 하청 및 노동자에 대한 압박에 나선 것은 게임 산업의 미래를 선도하는 책임을 등한시하고 소비자 요구를 핑계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회주의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이 문제될 때만 이럴까? 소비자 요구가 단기적으로 실이 될 때는 무시하고, 득이 될 때는 수용하는 척하는 일이 이미 일반화되지 않았나? 콘텐츠 산업은 혁신적 시도가 생명이라고 하는데, 이런 현실에서 그런 걸 기대할 수 있을까?

쓰다보니 정치권 얘기처럼 느껴진다. 대의 정치도 유사한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현상들은 과거에 진중권이 비유한 것처럼 거시적인 것이 미시적 구조 속에서 거시적으로 반복되는 프랙털 구조처럼 반복된다.

정치가 더 나은 무언가를 지향하기 위하여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개의 정치 세력은 ‘강성 지지층’ 눈치 보느라 해야 할 바를 하지 않고 있다.

강성 지지층의 세계관도 앞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탈진실’에 가깝다. 그 안에서 서로 관철하고 싶은 것은 조국과 문재인을 배신한 윤석열을 탄핵하고, 박근혜를 탄핵한 문재인과 그의 후계 격인 이재명을 구속할 수 있는 세계이다.

이것은 그 자체를 논리적 완결성으로 구성할 수 없고 오로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지’로만 구성할 수 있기에, ‘취향’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지지자들은 이 ‘취향’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정치 세력에 요구하고, 정치인들은 지지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면서 자기 이익의 수호를 위해 움직인다. 그러니 발전도 없고 대안도 없다. 퇴행과 소모적 논쟁만 남는다.

정치판도 게임계도 이러다 다 죽겠다는 절박함이 없으면 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걸 자각하도록 하는 것도 시민의 몫이다. ‘취향’을 떠나 잘못할 때는 잘못했다 하고 잘할 때에는 잘한다고 하는 게 시작이다.

김민하 정치평론가

김민하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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