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축복과 저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의 화이부동] ‘한강의 기적’ 축복과 저주

서울에 살면서 지방을 찾는 사람들이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사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지방 사람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긴 하지만, 내심 “그럼 네가 내려와서 살아봐라!”라고 말해주고 싶어한다. 근데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법칙인가 보다. 18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가 남긴 다음 명언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시골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실은 그가 시골이 가장 좋아지는 것은 도시에서 시골에 관해 배우고 있을 때이다.”

미국 정치인들이 선거가 다가오면 거의 예외 없이 벌이는 이벤트가 ‘서민 코스프레’와 더불어 ‘공동체 예찬 쇼’다. ‘서민 코스프레’는 위선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공동체 예찬 쇼’는 그럴 위험 없이 비교적 안전하게 유권자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 정치인들이 예찬하는 공동체는 오늘날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이나 유권자 모두 똑같은 입장에서 가상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공동체 사랑을 동병상련하는 심정으로 음미할 수 있다.

공동체 예찬엔 좌우의 차이가 없다. 민주당 정치인도 찬양하고 공화당 정치인도 찬양한다. 모두 앞다퉈 찬양은 하지만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 아니 돌아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게다가 전통적인 공동체가 예찬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이었는지도 의문이다. 19세기 영국의 언론인이자 문필가인 월터 배젓은 공동체의 불편하고 억압적인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당신은 로마의 네로나 티베리우스 같은 폭군을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짜 폭군은 당신 옆집에 사는 이웃이라는 폭군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나도 해야 한다는 법보다 혹독한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필요보다 짜증나는 멍에가 또 어디에 있는가? 당신 집 바로 옆에 사는 사람의 눈보다 효과적으로 당신 집을 염탐하는 독재의 스파이가 또 어디에 있는가? 여론은 사람을 파고드는 힘이며,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제한다. 여론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다른 사람의 습관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공동체의 문제는 사실상 공동체가 요구하는 관습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1859)에서 “관습의 전제(專制)가 곳곳에서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 등장하면서, 관습보다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기질을 끊임없이 박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밀은 “지금 이 시대에서는 획일성을 거부하는 파격, 그리고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인류에게 크게 봉사하는 셈이 된다”며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에는 무언가 남과 다른 것을 일절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여론의 전제가 심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색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그러한 전제를 부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강한 성격이 충만할 때 거기에서 남다른 개성이 꽃핀다. 그리고 한 사회 속에서 남다른 개성이 자유롭게 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그 사회가 보여주는 탁월한 재능과 정신적 활력 그리고 도덕적 용기와 비례한다.”

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일방적으로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게 얼마나 있겠는가.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도시의 공기’에도 긍정과 부정의 두 얼굴이 있듯이, 공동체와 관습에도 그런 양면성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강의 기적은 쏠림 때문에 가능

새삼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년 합계출산율이 0.6명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지난주 정부 전망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걱정 때문이다. 한국은 공동체와 관습의 문법을 매우 빠른 속도로 깨부순 세계 최고 수준의 압축성장 국가였다. 이젠 과거완료형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문제가 지금의 저출산 추세와 무관한 걸까?

이 의문을 갖게 된 건 내가 최근 지인과 만나 무심코 뱉은 한마디 때문이다. “아직 멀었는데 뭘!” 지인의 아들이 35세인데도 결혼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하길래 내가 한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뜻도 없진 않았지만, 나로선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30대 후반 미혼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온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아직 5년 정도의 여유가 있지 않느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니 내심 평생 독신으로 살면 어떠냐는 생각도 있었다.

꼰대는 꼰대다워야 할 텐데, 내가 괜히 겉멋이 든 나머지 너무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에서 결혼은 공동체적 관습의 문제였다는 점에서 이건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왜,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까?” “부드러웠건 그렇지 않았건 가족과 주변의 압력이나 시선이 당신의 결혼 결정에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나요?” 왜 이런 걸 묻는 여론조사는 없는지 궁금하다.

하나 마나 한 정치판 여론조사는 너무 많아서 민폐가 되고 있건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관한 통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간 연애결혼과 중매결혼의 비중은 세대별로 어떤 변화 추세를 보였을지 그것도 궁금하다. 이른바 천박한 능력주의 시장논리가 연애와 결혼을 엘리트층의 특권으로 만들고, 이전의 소개·중매를 ‘촌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어 사실상 사라지도록 방치하거나 촉진한 죄가 우리 모두에겐 없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한국은 ‘쏠림’이 매우 심한 사회다. 어느 음식점이 좋다 하면 우우 몰려가 줄을 서서라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들 특유의 행태는 사회의 전 국면을 지배하고 있다. 전 경향신문 기자 장은교가 17년 전 ‘1천만의 신드롬 괴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탁견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늘 양극단만 존재한다. (중략) 경제활동 인구 세 명 중 한 명이 같은 영화를 보러가고, 1년에 10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드는 영화가 1~2편씩 양산되는 나라. 겉보기엔 이만한 문화적 소양을 가진 국민들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을 헤집고 들어가면 문화적 빈곤은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다.”

이런 ‘쏠림’ 현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은 그런 쏠림 덕에 가능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며 목숨 걸고 일한 것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로 여겼기 때문이다. 굶주리던 시절에도, 심지어 전쟁통에도 결혼을 하고 애를 낳은 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의 역사는 공동체와 관습을 붕괴시키는 ‘파괴적 혁신’의 역사이기도 했다. 미친 듯이 일하고, 미친 듯이 자녀를 공부시키는 한국인들의 관습은 ‘사회적 전염’의 형식으로 한 세대 넘게 지속되었다. ‘한강의 기적’을 문자 그대로 한강 중심의 기적으로 만들겠다는 듯, 역대 정권들은 경쟁의 병목 현상을 극단화한 ‘서울공화국’ 건설에 매진했다.

그것은 이제 비용 치를 것을 요구

그러나 그런 삶은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우리가 직접 관찰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사실상 결혼·출산 거부라는 급격한 변화의 ‘티핑포인트(갑자기 뒤집히는 점)’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었다. 모든 전염에 존재하기 마련인 티핑포인트는 어느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는 것 아닌가. 때마침 만개한 소셜미디어 소통은 삶의 비교와 평가의 기준을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면서 결혼·출산을 고난도의 도전처럼 여기게 만들고 말았다. “언제까지 이런 식의 살인적인 경쟁을 감내하면서 불안하고 각박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청춘남녀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도래한 티핑포인트는 결혼과 출산이 ‘미친 짓’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전파시켰고, 이는 결국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라는 기록으로 이어졌다.

그간 우리가 누려온 ‘한강의 기적’이라는 축복은 이제 저주의 부메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에게 비용을 치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와 문화는 따로 놀지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비롯된 경제적 현상일지라도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문화적 현상으로 녹아들게 되면 그 나름의 상대적 자율성을 갖기 마련이다. 문제 해결이 처음의 원인 제거로만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경제·사회적 해법과 더불어 문화·심리적 해법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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