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20년 넘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해 온 기관이다. 설립 직후인 2003년부터 차별금지법 성안 작성을 추진하였고, 2006년 국무총리에게 제정을 권고했다. 이후 2007년 법무부의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이 성소수자 혐오로 좌절된 이후에도, 인권위는 계속해서 이를 이야기해왔다. 2020년 제21대 국회 출범 직후에는 평등법 시안을 공개하며 다시 한번 강력히 국회에 제정을 권고했다.

그런 인권위에서 표결로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가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지난 3월25일 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미 일본군 성노예제 권고, 비동의간음죄 제정 등 주요한 내용에 관하여 몇 차례의 진통이 있었던 보고서이다. 그런데 심지어 최종 보고서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가 아예 제외되었다. 출석한 10명의 위원 중 4명만이 찬성 의결을 던졌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지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생각하면 가히 참사라 부를 일이다.

이 참사를 주도한 이들은 이충상, 김용원 두 상임위원이다. 이미 수차례 반인권적·모욕적 발언들을 일삼고, 인권위의 존재 의의를 흔드는 행동들로 인해 비판받아온 이들이다. 두 위원은 이번 보고서 심의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막말들을 내놓았다. 김 위원은 성정체성을 이유로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것은 인권위가 인권단체를 자처하는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 위원은 국회에서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했으므로 권고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회를 견인해서 인권을 실현할 인권위의 역할조차 망각한 발언이었다.

더욱이 문제는 이러한 두 상임위원의 주장에 다른 위원들이 동조를 한 것이다. 한석훈 위원은 두 상임위원과 같이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를 반대했고 이한별, 김용직, 김정혜 위원은 기권했다. 특히 김용직, 강정혜 두 위원은 이날이 처음 참여한 전원위였다. 그럼에도 혐오와 차별에 기반한 궤변에 암묵적인 동조를 한 것이다. 헌법과 국제인권법, 국가인권위원회법이라는 규범과 모두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원칙이 실종되고 오직 표결을 통해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렇게 인권위의 지난 20여년의 역사는 철저히 훼손되었다.

3월31일은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International Transgender Day of Visibility)이다. 사회를 살아가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들을 억압하는 성별이분법과 고정된 성별관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날을 앞두고도 소수자 인권 보장을 위한 정치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가시화의 날을 하루 앞둔 3월30일 서울 중랑구 교구협의회 주최 토론회에 참여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교회의 차별금지법에 대한 우려를 알고 있다면서, 성별정체성 차별이 명시된것이 문제를 복잡하게 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같은 자리에서 이승환 국민의힘 후보는 역차별 방지를 평등법의 선결조건으로 말하며 성전환 스포츠 선수를 문제로 지목하는 발언을 했다.

지금도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차별을 겪는 이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평등을 위해 정치인들이 적극 나서지 못하는 현실은 실로 유감스럽다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의 문제를 지적하고 정부와 국회가 인권을 실현하도록 견인하는 것이 인권위의 역할 아닌가. 그럼에도 인권위마저 더 이상 평등과 반차별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대체 지금도 혐오와 차별, 낙인에 고통받는 피해자들은 누구를 향해 호소할 수 있을 것인가

유엔은 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 독립적이고 사회 다양성을 반영한 평등기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인권위는 더 이상 평등기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인권위의 역사와 가치를 훼손하는 두 상임위원의 사퇴를 비롯해 인권위를 바로잡기 위한 각계각층의 고민과 대응을 촉구한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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