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 없는 역사 교과서

김민아 논설위원

팔이 저려온다. 눈도 침침하다. 경기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 207호. 요즘 ‘조정래나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베끼는’ 중이다. 1인당 1회 2시간으로 제한된 열람을 위해 이틀 전 e메일로 신청했다. 도착하자 서약서 용지를 내민다. ‘고등학교 역사과 교과용도서 검정심사 합격 도서의 견본을 열람하기 전에 아래와 같은 유의사항을 확인하였으며, 이를 어겨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민·형사상 책임을 질 것을 서약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유의사항 1번은 복제(인쇄·사진촬영·복사·녹음·녹화)와 전송 불가를 명시하고, 4번은 형사고발 가능성을 경고한다. 문화부 기자 시절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를 눈앞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도 서약서를 쓰지는 않았다. 교학사 교과서만 열람조건이 까다로운 건 아니지만, 검정 절차가 완료된 교과서에 시민의 접근을 제약하는 일이 타당한가. 지난 5일 오후 1~3시 전속력으로 읽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소감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반기는 역사 서술

[경향의 눈]‘주어’ 없는 역사 교과서

발상의 전환일까.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의 회고록을 싣다니. “당시 시행하는 정책은 전부 민비의 계책이었으며 국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근본적으로 화근을 제거코자 도모한 것이다.” 회고록 밑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과격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학습문제도 실었다. 가히 일본 우익도 놀랄 만한 과감성이다. 일제 강점기에 공중 보건과 전염병 예방에 힘쓴 결과 유아 사망률이 낮아지고, 식민지배가 지속될수록 근대적 시간관념이 한국인에게 수용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본 영자신문 재팬타임스는 ‘한국 교과서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찬양한다’고 보도했다. 이제 일본의 역사왜곡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승만·박정희에게 바치는 헌사

이승만의 이름은 11쪽에 걸쳐 80회 넘게 언급된다. 정확한 횟수는 세지 못했다. 표현도 주관적이다. “이승만은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 일제 강점기에 여론조사를 했을 리 없다. 서술 근거가 궁금해진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제2공화국 수립 과정은 모두 17행으로 다뤄진다. 단일 사안인 새마을운동은 21행에 걸쳐 소개된다. 분량만 보면 헌법 전문에 나오는 4·19 혁명보다 “새벽종이 울렸네”가 중요해 보인다. 10월 유신을 “자유민주주의 정도에서 벗어난 비상체제인 동시에 독재”라고 규정하면서도 1쪽에 가까운 분량을 미·소의 데탕트 외교, 닉슨 독트린, 북한의 군사력 증강 등을 들어 유신의 불가피성을 설파하는 데 할애한다.

#‘주어’의 실종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제주 4·3사건), “남한에서도 민간인들에 대하여 살상이 일어났다. (중략) 이들이 북한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이들을 처형하였다”(국민보도연맹 사건), “시위대의 일부가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점거하였다. 계엄사령부는 계엄군을 광주에 진입시켜 광주를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였다”(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과 살상은 있는데, 이를 야기한 주체는 없다. 2007년 대선 전 이명박 후보가 “BBK를 설립했다”고 말한 동영상이 공개되자 주어가 빠졌다고 한 나경원 전 의원 사례를 연상케 한다. 4·3과 5·18은 정부가 공식 인정한 ‘국가폭력’ 사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울산보도연맹사건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사과한 바 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주어를 숨겼나.

“(열람시간이) 10분 남았습니다. 5분 전에는 정리해주세요.” 책을 돌려주는데 가벼운 현기증이 인다. 갈등과 분열의 냄새 탓이다.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직후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선포했다. 김 의원이 말한 전쟁은 곧 개시될 것이다. 첫걸음은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일선 고교에 독려하는 일이 될 테다. 보수성향 교육감과 교육단체, 사학 이사장과 교장들이 총대를 멜 가능성이 높다. 이 전쟁은 그러나 좌파 대 우파의 싸움이 아니다. 이성 대 몰이성, 상식 대 비상식의 싸움이다. 그래서 위험하고, 중요하다. 최소한 ‘합정동 RO 모임’에서 논의했다는 ‘비비탄 총 전쟁’보다는 위험하고 중요하다. ‘이석기의 전쟁’은 시대착오적 몽상에 기댔을 뿐이지만 교과서 전쟁은 적잖은 기득권층의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다. 시민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내년 3월 고교 교실에서 친일과 독재를 정당화하는 한국사 수업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과거를 들려주고 어떤 미래를 꿈꾸게 할 것인가.

(부끄럽다. 양심의 자유에 어긋나는 서약서 작성을 거부하지 못했다. 서약서를 채우면서 ‘소속’란은 비워뒀다. 기자임을 밝혔다가 열람 못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국사편찬위원장은 연락하시기 바란다. 서약을 했으니 책임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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