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의 부활과 기업 투자

박문규 논설위원

꼭 16년 전인 1998년 12월의 일이다. 현대와 LG그룹의 사운을 건 반도체 ‘빅딜’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구본무 LG 회장은 호출을 받고 청와대를 찾았다. 가방 속에는 빅딜의 부당성을 설명할 자료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구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가방은 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폭음으로 쓰린 심정 달랬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애지중지하던 반도체를 포기한 구 회장은 이후 “반도체의 ‘반’자도 꺼내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회사가 하이닉스(옛 현대전자)다. 성탄 전야를 달군 반도체 빅딜이 훗날 길고 긴 ‘승자의 저주’에 시달릴 줄이야.

[경향의 눈]하이닉스의 부활과 기업 투자

사실 하이닉스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회사다. 반도체 빅딜은 누가 보더라도 무모했다. 예나 지금이나 반도체는 세계 1위 수출산업이다. 한국은 과감한 선제투자로 종주국 일본을 제치고 1위를 꿰찼다. 일본은 10여개 회사가 난립했지만 우리는 3곳(삼성·현대전자와 LG반도체)이었다. 빅딜로 회사 수를 줄이면 득 볼 곳은 일본뿐이었다. 더구나 양사를 합치면 부채가 15조원을 넘었다. 고금리를 생각하면 금융비용만 연 1조원 넘게 짊어져야 할 판이었다. 빅딜 전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필자가 망국적인 빅딜이라며 반대했던 이유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빚더미에다 반도체 불황이 겹치면서 하이닉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빚 얻어 빚 갚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투자는커녕 구조조정을 통해 살아남는 데 급급했다. 사업을 팔고 인력의 반을 줄이는 아픔도 겪었다. 정치권의 ‘불장난’으로 시작된 빅딜이 어떤 처참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DJ 정부 빅딜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위기를 쏘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끝내 삼각 빅딜에 대한 진실은 TJ(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됐다. DJ인지 TJ인지 이젠 정말 확인할 길이 없게 됐다.”

얼마 전 하이닉스 이천공장을 찾았다. 감회가 남달랐다.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게 반가웠다. 공장 곳곳에는 구조조정의 생채기가 남아 있다. 200㎜ 웨이퍼 생산라인을 300㎜로 교체하면서 기존 공장을 리모델링해 쓰고 있다. 신형 에쿠스가 나왔지만 돈이 없어 구형 그랜저를 엔진만 바꿔 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한 개 라인에 붙어 있어야 할 공장이 4곳으로 흩어져 있으니 생산성은 물어보나마나한 얘기다. 그래도 하이닉스 관계자는 “세계 반도체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리모델링)성공사례”라고 했다. 말이 그렇지 알고 보면 참 슬픈 얘기다. 공장 한쪽에서는 새 공장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5년간 15조원이 투자될 예정이다. 하이닉스 출범 후 번듯하게 짓는 사실상 첫 생산라인이다. 직원들의 쌓이고 쌓인 ‘투자 설움’을 생각하면 의미가 남다르다. 든든한 새 ‘물주’를 만나 가능한 얘기다.

2012년 SK의 하이닉스 인수는 일종의 승부수다. 9조원을 웃도는 부채에다 3조3000억원의 인수자금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매물이다. 적자가 나도 매년 4조원 안팎을 계속 투자해야 하는 반도체 사업의 속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나마 반도체 시장 여건도 좋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내내 매각작업이 무산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SK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투자만 풀어주면 하이닉스가 살아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업종 불문하고 세계 1~2위 업체는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 내수 위주의 SK그룹 사업구조를 수출로 전환할 기회였다. 최 회장의 베팅은 적중했다. 인수 2년 만에 하이닉스는 사상 최대치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다. 주가도 전성기의 2배 이상으로 올랐다. 우리 경제를 봐도 주력 수출업종의 부진을 감안하면 하이닉스의 부활은 그야말로 든든한 버팀목이다.

대기업 총수들은 늘 “미래 먹거리를 내놓으라”며 임직원들을 다그친다. 올 9월 말 기준 10대그룹 금고에 잠자는 돈만 125조원이다. 재계가 올 초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겠다”며 투자 확대를 약속했지만 1~9월 중 30대기업 설비투자는 오히려 7%가량 줄었다. 기업 투자는 우리 경제의 성장 못지않게 일자리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두다. 최근 2년간 하이닉스에서 투자 확대로 늘어난 일자리가 3000여개다. 투자는 선택의 문제다. 일감 몰아주기라면 몰라도 앉아서 돈 버는 사업은 없다. 요즘 잘나가는 기업들 중 과감한 선제투자로 주목받는 회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이게 우리 경제의 암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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