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의 표정, 이명박의 표정

이중근 국제부장
[아침을 열며]클린턴의 표정, 이명박의 표정

탁월한 협상가로 중국 외교의 기틀을 다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는 5가지 웃음이 있었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되기 전 그는 소련의 국가지도자를 만나면 양팔을 활짝 벌리며 파안(破顔)했다.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소비에트 동지들에게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만큼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에게는 양팔을 벌리진 않았지만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외교관을 만났을 때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초연한 듯한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부하들을 만나면 안면 윗부분 근육만 살짝 움직이는 잔잔한 미소로 응대했다.

세련된 외모에 소싯적 연극을 했던 그는 이처럼 표정 연기를 외교와 정치 무대에서 십분 활용했다. 덕분에 그는 냉전 속에서도 동양인 특유의 엄숙함과 딱딱할 수 있는 혁명가의 이미지를 예술의 수준으로 승화했다는 평과 함께 서방의 특별한 호감을 얻었다.

그만큼 다양하고 섬세하진 못하지만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매력적인 미소가 장기다. 그러나 북한에 억류돼 있던 여기자들의 석방 교섭차 지난 4일부터 이틀 동안 방북하는 동안만은 예외였다. 평소 시원스레 웃던 것과는 딴판으로 내내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순안공항 도착 직후 화동에게 웃음기 없는 표정을 건네더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는 애처로울 만큼 긴장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김 위원장이 간간이 미소를 띠는 여유를 보였다. 그의 웃음은 석방된 두 여기자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밥호프 공항에 내린 뒤에야 얼굴에 번졌다.

여기자 석방교섭때 무표정 연기

클린턴의 굳은 표정이 긴장감 탓은 아니다. 자신의 방북이 북·미간 우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북한에 보여주면서 핵실험 등에 대한 제재 조치가 약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더불어 미국인들에게 이번 교섭에서 북한에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내포돼 있다. 2001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방북 중 웃었다가 비판받은 것을 염두에 둔 표정관리이기도 하다. 북한과의 회담에 깊숙이 간여했던 한 인사는 “ ‘절대 웃지 말라. 웃더라도 활짝 웃지 말라’는 게 대북 협상가들 사이의 불문율”이라고 소개했다.

이쯤에서 클린턴의 방북을 지켜본 이명박 대통령과 대북 협상책임자들의 표정이 궁금하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지난 7일 김성환 외교안보수석 등으로부터 미 여기자 석방에 대해 보고받고 “131일째 억류돼 있는 개성공단 근로자 유모씨와 연안호 선원문제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도 정부를 믿고 지켜봐달라”며 “한·미 양국이 미 여기자 석방문제와 관련해서 사전과 사후에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했다”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수면 위에서 뭐가 잘 안보인다고 해서 수면 아래 움직이는 무수한 물갈퀴 질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유씨에 대한 석방 노력이 미흡하다는 지적과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 먹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대한 반박이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후 남북관계를 보면 이런 설명이 썩 미덥지 않다. 강경 대응으로 일관해온 상황에서 무엇을 지렛대로 석방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추진하면서도 뉴욕 대화채널은 열어놓았는데 우리는 핫라인마저 끊기지 않았는가. 특사설이 오가지만 마땅한 자원도 현 정부엔 없다.

미덥잖은 정부의 대북 대응력

지난달 29일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은 CNN에 출연, “북한의 협상가들은 내가 상대해본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강한 협상가들”이라고 말했다. 최강대국의 전직 외교수장이 그렇게 평가하는 게 북한이다. 현 정부와 한나라당이 그토록 외쳐대는 ‘대책 없이 퍼주기만 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잘못했다고 비판만 할 게 못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김정일 위원장은 방북한 클린턴을 통해 특단의 제의를 미국에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과 정반대의 내용임이 뻔하다. 그런데도 긴밀한 한·미간 공조만 외칠 것인가. 북한을 냉정히 대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바탕에 깔고 난 다음에 할 일이다. 유씨 석방 교섭에 진전이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유씨가 돌아올 때 이 대통령의 표정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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