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세대’ 지지 없이 이들의 미래도 없다

박성민

2030의 힘, 어디로

[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미래 세대’ 지지 없이 이들의 미래도 없다

3월9일 네 명 중 한 명은 승자
나머진 혁명 수준의 ‘리빌딩’ 불가피
민주·보수·중도·진보 누구든
새로움의 핵심은 ‘젊은 세대’ 지지

설연휴에 ‘칸딘스키, 말레비치&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 전시를 관람했다. ‘검은 사각형’으로 유명한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사물을 묘사하는 부담에서 예술가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며 사각형, 원, 직사각형의 기본적 형태로만 그림을 구성한 극단적 추상 회화로 후대 미술가들이 구상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나아가는 데 풍부한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실리 칸딘스키는 점, 원, 지그재그, 곡선, 대각선을 과감하게 활용했다. 말레비치가 ‘검은’ 사각형으로 충격을 줬다면 “색은 영혼에 떨림을 줌으로써,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라고 주장한 칸딘스키는 화려한 색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선명한 색과 기하학적 형상으로 구성된 그의 그림은 추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 전야에 젊은 아방가르드는 기존 예술을 전복하는 ‘예술 혁명’의 전위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혁명 예술’의 눈에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불온한 선동으로 보였다. 예술적 자유를 위협받은 이들이 검열과 탄압에서 살아남기 위해 추상에서 구상으로 돌아가 생존을 모색한 슬픈 역사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재평가된 이들은 20세기 현대 미술, 건축, 디자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분야든 기존 체제를 전복시키는 아방가르드는 ‘앙팡 테리블’ 몫이다. 우리도 1957년 기존 국전에 반대하며 ‘앙포르멜’을 주도한 현대미술가협회 주역들은 20대다. 개혁 주체에서 개혁 대상으로 전락한 ‘586’도 20대인 1980년대에는 기존 체제의 전복을 꿈꾼 아방가르드였고 앙팡 테리블이었다.

며칠 전 ‘586 세대’ 대선 후보 네 명의 TV토론을 봤다. ‘RE100’ ‘EU 택소노미’ 같은 생소한 미래(?) 용어가 나왔지만 이들 모두 기존 체제 전복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라는 인상을 줬을 뿐이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이번 대선에서 기존 체제 전복을 꿈꾸는 아방가르드는 앙팡 테리블 이준석이 속한 ‘MZ세대’다. 대선 후보와 기성 정당은 20세기 캠페인에 머물러 있는데 ‘디지털 네이티브’인 이들은 21세기 캠페인을 즐기고 있다.

3월9일 한 사람은 승자가 될 테고 나머지는 모두 패자가 될 것이다. 진 쪽은 엄청난 후폭풍에 휩싸일 것이다.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회복할 시간이 없어 지방선거에서 반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2024년 총선에서 반격을 목표로 ‘모든 걸 헐고 새로 짓는’ 리빌딩이 불가피하다. 혁명 수준의 ‘NEW 민주당’ ‘신진보’ ‘새로운 보수’ 운동이 올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민주·보수·진보 누구든 새로움의 핵심은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기존 체제를 전복시키려 혁명적으로 진군하는 미래 세대의 지지를 잃는 세력의 미래는 없다.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지금 민주당과 정의당은 그들의 지지를 잃고 있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 이젠 “말하지 못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정의당이 체제 전복의 주체인 아방가르드가 되지 못한 것은 2017년 대선 이후 수십 년 진보를 짓눌러 온 ‘민주 대 반민주’ 족쇄에서 ‘해방’을 선언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속의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탈출해야 할 절호의 기회에 ‘시혜를 바라고’ 눌러앉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고 썼다. 용기가 없으면 알을 깨고 나올 수 없다. 나오지 못하면 죽는다.

용기 부족은 안철수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기득권 양당 체제를 전복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제3의 길’을 뚝심 있게 걸었어야 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숫타니파타 경구 같은 결기가 있어야 했다. 2011년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양보, 2012년 문재인에게 대선 후보 양보, 2014년 민주당과 합당, 2020년 미래통합당과 선거 연대, 2021년 국민의힘 오세훈과 후보 단일화. 중도를 찾아 이 길 저 길 헤매다 중도에 길을 잃었다.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왕>에서 세 딸의 사랑을 시험했던 리어왕은 달콤한 말로 아버지의 권력과 영토를 물려받은 두 딸에게 버림받고 광인이 되어 광야를 헤매다 이렇게 외친다. “여기 과인을 아는 이 없는가? 이건 리어가 아니다.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국민의힘은 보수 정당이다. 국민의당은 중도 정당이다. 정의당은 진보 정당이다. 자기도 알고 남도 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민주당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지금 민주당은 우리가 알던 김대중·노무현·김근태의 민주당이 아니다. 만약 민주당이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중도 실용과 국민 통합’ ‘반칙과 특권이 없는 나라’ ‘원칙 있는 승리’ ‘민주주의’와 같은 김대중·노무현·김근태 정신을 정말로 계승했다면 2022년 대선 압승으로 ‘주류 교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은 권력에 취해 달콤한 아부에 눈이 먼 리어왕처럼 광야로 쫓겨날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2017년 다시 안 올 역사적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국회의원 234명이 찬성하고, 국민 80% 이상이 지지해준 탄핵 동력을 ‘개혁 연대’로 전환시켰다면 ‘1987 체제’ 이후 30년 만에 대한민국을 리빌딩하는 ‘2017 체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자기들만 탄핵의 주역인 양 오만한 착각에 빠져 2020년 정의당을 버리고, 2021년 2030세대마저 잃었다. 2017년 탄핵 이후 중도 보수가 이탈하여 ‘보수 동맹’이 붕괴한 것같이 2030세대 이탈로 ‘민주 동맹’도 와해 직전이다.

‘보수 동맹’이 무너질 때처럼 위기의식이 없다는 점도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2016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얼마 안 돼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대통령 탄핵마저 “It’s none of my business”처럼 대했는데 지금 민주당 의원들 분위기가 딱 그렇다. 총선은 아직 2년 넘게 남았고, 공천이나 당선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야당이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급한 건 이재명 후보와 지지자들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①위기에 동의하는가? ②원인은 무엇인가? ③해결책은 무엇인가? 순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위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 문재인과 이재명이 ‘원팀’이고, 지금 상황이 위기라는 데 동의한다면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야당과 언론을 상대로 저렇게 거칠게 말하도록 내버려둘 리 없다. 이해찬 말대로 정말 승리를 자신하는 걸까? 절박감도 위기의식도 없다.

기득권은 상대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혁신은 자기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기득권이다. 정권 교체 여론은 55%를 넘나들고 있지만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여론은 그보다 훨씬 낮다. 민주당이 여전히 승리를 자신하는 이유다. 하지만 ‘민주 동맹’에서 이탈한 2030세대가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정권 심판의 알을 낳기 위해 ‘잠시 빌린 둥지’로 생각하는 것이 민주당이 직면한 문제다. 특히 2030 남자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미 윤석열을 택한 듯하다.

이준석은 오바마의 설득력과 트럼프의 전략적 영민함을 동시에 갖췄다. “오바마가 되고 싶지만 실제는 트럼프에 가깝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실제로 ‘트럼피즘의 한국 상륙’ 징후는 이준석 체제 이후다. 일자리를 잃은 백인의 분노를 숙주 삼아 트럼피즘이 확산되었듯 2030세대의 분노를 타고 포퓰리즘이 확산되고 있다. ‘허경영 현상’도 무시할 수 없는 실체다. 정치적·도덕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지만 (전략적으로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이준석과 그의 세대는 ‘586 체제’를 전복하는 아방가르드다.

한국의 유권자 지형을 세대로 분류하면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①1953년 이전에 태어난 ‘전쟁 세대’ ②1953년에서 1973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③1973년부터 1983년에 태어난 ‘X세대’ ④1983년 이후 태어난 ‘MZ세대’다.

전쟁과 가난을 겪은 ①세대의 실존적 키워드는 ‘생존’이다. 개인도 국가도 살아남아야 했다.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는 그 시대의 모토다. 독재를 경험한 ②세대의 상징적 키워드는 ‘민주’다. 두렵지 않아서 싸운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얻는 것은 가치가 없기 때문에 싸웠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문화적 르네상스’인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③그룹은 ‘개방’의 시대를 맞아 무한경쟁으로 내몰렸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선진국에서 태어난 ④그룹은 절망스러운 극단적 격차 시대에 태어나 ‘공정’을 갈망한다.

①세대는 ‘국민’ ②세대는 ‘시민’ ③세대는 ‘소비자’ ④세대는 ‘개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현재 세대별 판세를 분석하면 ①세대는 윤석열 지지가 압도적이다. ②세대 중 50대는 이재명, 60대는 윤석열의 상대적 우위다. ③세대는 이재명 우세가 확고하다. ④세대는 20대는 윤석열 우위, 30대는 치열한 경합이다. 2030세대가 ‘민주 동맹’에서 이탈한 이후 지형은 민주당에 불리한 것은 분명하다.

2022년 3월9일 이후 누가 이기든 모든 정당의 재구성은 피할 수 없다. 방향은 기존 체제를 전복시키려 몰려오는 2030세대의 지지를 받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586’은 이제 개혁 주체가 아니라 개혁 대상이다. 민주당은 정권 교체와 세대교체의 대상인 ‘이중 기득권’ 상황에 처했다. 민주당 위기의 핵심이다.

국민의힘 이준석, 정의당 장혜영같이 내부에서 혁신을 이끌 ‘MZ세대’ 정치인도 보이지 않는다. 혁명의 무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혁명 세대가 몰려오고 있다. 어느 정당이든 혁신하지 않으면 혁명당한다.

■박성민

[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미래 세대’ 지지 없이 이들의 미래도 없다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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