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그들은 누구인가

⑤비자발적 중도

‘가운데’로 피신한 사람들

투표 땐 분명한 성향…겉만 ‘중도’

“반대인 사람들과 감정 소비 안 해”

시민들이 2024년 새해 첫 출근일인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성동훈 기자 사진 크게보기

시민들이 2024년 새해 첫 출근일인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성동훈 기자

“난 보수지만 어디 가서 시비 붙기 싫으니까 그냥 중도 성향이라고 해요.”

정치와 이념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두려움은 유권자들을 중도로 몰아가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 지지 정당이나 이념 성향이 다를 경우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우려해 주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중도라고 밝히는 경우이다. 실제 투표를 할 분명한 이념 성향을 갖고 있지만 겉으론 중도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진짜 중도가 아닌 이른바 ‘샤이(shy) 진보’ 혹은 ‘샤이 보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양동우씨(48)는 경향신문이 지난해 12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웹 설문조사에서 ‘매우 진보를 0, 중도를 5, 매우 보수를 10이라고 할 때, 자신의 이념 성향이 어디에 가깝다고 보나’라는 문항에 ‘8’이라고 답했다.

양씨는 “나 같은 경우 실제론 강경한 보수지만 생각이 반대인 사람들과 시비가 붙거나 감정이 소비되는 게 싫으니까 그냥 중도라고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샤이 보수에 속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나처럼 그냥 어디 가서 싸우고 욕먹기 싫으니까 기계적으로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설문에서 자신의 이념 성향을 ‘3’으로 답했다는 황재숙씨(51) 역시 겉으로는 중도인 척한다고 말했다. 황씨는 “사람은 잘 안 바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일부러 하지 않는다”면서 “나와 정치 성향이 맞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선 내 의견을 크게 강조하진 않고 일단 들어주는 편”이라고 말했다.

뚜렷한 이념 성향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게 싫어 실제로 자신의 성향을 스스로 중도로 바꾼 경우도 있었다. 과거 진보 진영을 지지했지만 설문에서 이념 성향을 ‘5’로 답했다는 고선희씨(40)가 그런 사례에 속한다. 고씨는 “정치 문제로 다투지 않기 위해 ‘적당하게 반쯤 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고, 중도로 살기로 했다”면서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거나 어떤 게 진실인지 속속들이 알진 못하더라도 이편이 낫다”고 말했다.

정당 간극 커지며 이념 정렬 강화
전문가 “정서적 양극화에도 영향”

자신의 이념적 속내를 숨기고 중도로 피신하는 시민들이 나오는 건 ‘이념적 정렬(ideological sorting)’ 강화에 따른 결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념적 정렬이란 유권자들의 이념이나 정책 선호가 지지 정당별로 정렬되는 현상이다. 이념적 정렬이 강화돼 정당 간 간극이 커지면 상대 정당에 대한 적대감이 증폭하고, 나아가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배척하는 심리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김성연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념적 정렬에 따른 양당 지지자들 사이의 이념 차이 확대는 정서적 양극화에도 영향을 미친다”면서 “정당 지지자들 사이의 이념적 차이가 벌어질수록 자기 정당(내집단)과 반대 정당(외집단)의 구분이 더 뚜렷해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매번 정권이 교체된 지난 18~20대 대선을 거치면서 양당 지지자들이 반대 정당에 대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지속적으로 강해졌다는 실증적인 분석도 있다.

‘대통령 선거 관련 유권자 의식조사’(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반대 정당에 대한 좋거나 싫은 정도를 나타내는 점수(5점 만점. 낮을수록 싫어하는 감정 강함)는 18대 대선에서는 3.5였으나, 19대 대선에서는 2.8로 낮아졌다. 이 점수는 20대 대선에서는 1.7까지 하락했다.

김 교수는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양당 지지자들이 진보와 보수로 강하게 결집하면서 동시에 이들 사이의 정서적 양극화도 심화됐다”며 “사람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더라도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선호를 자연스럽게 밝히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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