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그림자를 낚아챈 순간, 잃어버린 세계의 문이 다시 열렸다

김창길 기자
에드워드 커티스, 첼리 협곡을 지나는 나바호족(Canyon de Chelly, Navajo). 1904 / 미국 의회도서관

에드워드 커티스, 첼리 협곡을 지나는 나바호족(Canyon de Chelly, Navajo). 1904 / 미국 의회도서관

남태평양에 출몰하던 난폭한 향유고래를 잡으러 떠난 뱃사람의 방대한 항해일지 <모비딕>의 첫 문장은 간결하다. “Call me Ishmael.” 한글 번역을 찾아봤다. “내 이름은 이슈마엘”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발음이 조금씩 다른 화자의 이름은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과 영어 철자가 똑같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서 위대한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할 것이라 약속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80세가 넘어도 자식을 얻지 못했다. 기다림에 지친 아내 ‘사라’는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던 해, 사라는 아들 ‘이삭’을 낳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난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추방당한 자’ ‘유랑자’ ‘떠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성서의 이스마엘은 광야를 떠돌고 <모비딕>의 이스마엘은 바다를 유랑한다. 고래잡이 마을 낸터컷에서 이스마엘은 폴리네시아 식인종 작살잡이와 포경선에 오른다. 선장의 이름은 ‘에이헤브’. 유대인 역사에서 폭군으로 기록된 ‘아합’의 영어식 표기다.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어 복수심에 불타는 에이헤브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과 선원들을 거느리고 고래를 추적한다. 포경선의 이름은 ‘피쿼드(pequod)’다. 북미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영국인들이 몰살시킨 코네티컷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고래잡이 항해일지 제42장에서 이스마엘은 ‘고래의 흰색’이 주는 공포감을 햄릿의 독백처럼 늘어놓는다. 흰색은 좀체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숨기고 있기에 더 많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거대한 흰색 수의를 걸친 바다 괴물 리바이던은 심연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피쿼드호를 향해 달려든다. 소설을 ‘하얀색’ 향유고래와 포경선 ‘피쿼드’의 싸움으로 도식해 본다면 모비딕은 백인 제국주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다. 백인 정착민에게 멸종당한 북미 인디언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의 북아메리카는 모비딕을 그렇게 해석해도 될 만한 분위기가 만연하다.

에드워드 커티스, 캐나다 원주민 콰키틀족의 월식 춤(Dancing to restore an eclipsed moon). 1914 / 미국 의회도서관

에드워드 커티스, 캐나다 원주민 콰키틀족의 월식 춤(Dancing to restore an eclipsed moon). 1914 / 미국 의회도서관

지난 7월1일은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154주년 ‘캐나다의날’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캐나다는 우울했다. 수도 오타와 의사당의 첨탑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캐나다 데이를 취소하라!” 캐나다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 후손들은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빅토리아시에 있는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의 동상이 철거되고 나무로 만든 빨간 드레스가 세워졌다. 위니펙시의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동상도 훼손됐다. 시위대의 손팻말에는 “모든 아이가 소중하다(Every Child Matters)”라고 적혀 있었다. 캐나다 정부와 기독교가 운영하던 원주민 기숙학교 인근에서 1100구에 이르는 어린이 유해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캐나다 정부는 1883년부터 원주민 어린이들을 서구 기독교 문명에 동화시키기 위한 학교를 운영했다. 가족들로부터 강제 격리된 기숙사 학교였다. 선생님들은 입학 첫날 아이들의 머리를 짧게 잘라냈다. 교내에서 원주민 언어의 사용도 금지됐다. 육체적이고 성적인 학대도 많았다. 빈번한 탈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상당수의 어린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원주민 기숙학교 학생이었던 플로렌스 스파르비에는 “그들은 우리가 영혼이 없다고 믿도록 했다”고 회상했다. 캐나다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원주민 기숙학교의 학생 4100여명이 영양실조, 질병, 학대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최근 발견된 무연고 어린이 유해와 학교와의 관계는 아직 명확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상관없이 학교가 원주민들의 토착 문화를 말살했다는 점은 확실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이웃 나라 미국의 원주민 학교도 사정은 비슷했다. 원주민 어린이들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조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정부도 인디언 보호구역 밖에 기숙학교를 세워 원주민 어린이들을 입학시켰다. - 잠시 용어를 정리해본다. 캐나다에서는 북미 대륙의 옛사람들을 캐나다 원주민(Indigenous people in Canada)으로 부른다. 미국에서도 원주민(Native Americans)으로 부르기도 하나 이번 사진공책에는 캐나다 원주민과 구분하기 위해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s)’으로 적는다. - 입학 첫날, 선생님들은 아메리칸 인디언 학생들의 이름을 바꾸었다. ‘앉아 있는 소’ ‘미친 말’ ‘붉은 구름’ ‘검은 매’ ‘점박이 사슴’ ‘하품하는 사람’…. 성과 이름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이름은 학교는 물론 정부 차원의 신원 조사와 인구 파악을 위한 문서 작업에 적합하지 않았다. 방학이 되어도 어린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백인사회 실습 프로그램 ‘아우팅(outing)’이 방학 동안 실시돼 백인들의 농장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1879년 설립된 첫 번째 인디언 기숙학교였던 칼라일의 교육 방침은 ‘인디언을 없애고 사람을 만든다(kill the indian and save the man)’였다.

에드워드 커티스, 나바호족의 주술 춤(Navajo Yehichai dancer). 1900 / 영국 웰컴 컬랙션

에드워드 커티스, 나바호족의 주술 춤(Navajo Yehichai dancer). 1900 / 영국 웰컴 컬랙션

사라져가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얼굴과 그들의 전통문화를 성실히 기록한 사진가가 있다. 6학년 때 학교를 뛰쳐나와 자신의 카메라를 만들었던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 Curtis, 1868~1952). 17세에 사진 견습생이 됐고 2년 만에 본격적인 사진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거점은 시애틀. 두와미쉬 수쿼미시족 추장의 이름을 물려받은 미국 북서부의 최대 도시였다. 시애틀 추장의 딸 안젤린 공주를 만난 건, 그래서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1895년 조개를 줍는 노년의 인디언 공주를 사진에 담았고, 이 사진으로 에드워드 커티스는 미국립사진협회 금메달을 받았다.

인디언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1898년 시애틀 남동쪽 레이니어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민속학자 그린웰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다음 해, 해리먼 알래스카 탐험대에 합류한다. 알래스카에까지 자신의 야욕을 펼치고 싶었던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이 꾸린 탐험대에 속한 그린웰이 에드워드 커티스를 사진사로 초청했던 것이다. 탐험선에 오른 에드워드 커티스는 손 놓았던 학업을 저녁 선상에서 이어가며 민속학에 빠져든다. 1년 후 아메리칸 인디언 블랙풋족을 찾아 떠나는 탐험대에도 참여한다. 나중에는 커티스가 직접 아메리칸 인디언 탐험대를 꾸리며 인류학자, 저널리스트, 영어를 할 수 있는 인디언을 고용한다. 그의 인디언 사진을 좋아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재정적 지원을 받으라며 은행가 J P 모건을 소개한다. 하지만 모건의 지원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저 탐험에 필요한 경비 정도였다. 돈벌이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가정생활이 좋았을 리 없다. 아내는 이혼을 통보했다. 30년 동안의 아메리칸 인디언 원정을 마쳤을 때 그의 건강은 악화됐고 재정도 파탄 났다. 자신의 인디언 프로젝트에 대한 권리도 모건에게 넘겨주었다.

에드워드 커티스의 사진들은 그의 사후에 주목을 받았다. 1969년 아메리칸 인디언 대학생 80여명이 자신들을 ‘모든 부족의 인디언(Indians of All Tribes, IAT)’이라 선언하며 악명 높은 죄수들을 가두었던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섬을 점령했다. 인디언의 땅을 원래 주인이었던 인디언이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한 ‘수족 협정(Sioux(인디언 부족 이름) Treaty)’을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부족의 인디언 알카트라즈 점령 사건은 인디언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부활시키려는 ‘레드 파워(Red Power)’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에드워드 커티스의 사진을 소장하고 있던 기관들은 그의 사진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80여개의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을 담은 4만여장의 사진들이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커티스를 만났던 20세기 초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그를 ‘그림자를 잡는 사람(shadow catcher)’이라고 불렀다. 그가 찾아다닌 그림자는 사라지는, 혹은 사라져버린 인디언 문화의 흔적들이었다. 백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정한 보호구역에 수감됐다. 터전을 잃었으니 삶의 방식이 오롯이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에드워드 커티스는 인디언들에게 옛날 복장을 하고 전통 생활을 재현해줄 것을 주문했다. 사진만 찍은 것이 아니다. 그들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는 인디언의 생애사를 녹음하고 재현된 전통의식을 영화 필름에 담았다. 1914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머리 사냥꾼들의 땅에서(In the Land of the Head Hunters)>는 캐나다 정부가 금지했던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 의식을 보여준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출연한 최초의 영화였다. 평가는 상이했다. 멜로드라마와 같은 줄거리와 세부 사항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민속학자들이 비판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디언들의 가면과 복장, 건축물, 카누 그리고 춤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훌륭하게 재현했다는 칭찬도 있었다. 어떤 이는 그를 비주얼 민속학자로 추켜세웠다.

에드워드 커티스의 아메리칸 인디언 사진은 민속학자로서의 엄밀함과 솜씨 좋은 인물 사진가의 감수성이 교차한다. 정면과 측면의 사진 앵글은 한 종족의 전형적인 얼굴 형태를 추출하려는 민속학자의 객관적인 접근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아메리칸 인디언의 표본을 수집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유럽의 민속학이나 인류학으로 풀어낼 수 없는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눈빛과 표정이 포착됐다. 주술사가 된 사진가는 인디언들에게 태양 춤을 추라고 마법을 건다. 곡기를 끊고 생살을 뜯어내고 신들의 탈을 쓰고 며칠 밤을 지새며 춤을 추는 인디언들. 그들의 그림자를 낚아채는 사진 주술사. 그리고 결국 잃어버린 세계의 문이 다시 열린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찾아 헤맸던 곳도 잃어버린 세계, 에덴동산이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던 책은 인도로 가는 항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지상낙원으로 안내하는 피에르 다이 추기경의 지리학 논문이었다. 중앙아메리카의 히스파니올라섬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자신이 에덴동산 근처에 왔다고 믿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북아메리카에 이주한 한 침례교 목사는 인디언의 뱀 유적지를 보고 에덴동산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백인들의 조상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욕심 때문에 추방당했지만 인디언은 타인의 탐욕 때문에 쫓겨났다. 에드워드 커티스는 이러한 백인들의 탐욕을 용서받기 위해 황야를 30년 동안 떠돌았던 게 아닐까? 인류의 원죄를 용서받기 위해 광야에서 고난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에드워드 커티스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북아메리카에서 추방당한 “위대한 인류”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C. S. 플라이, 제로니모(오른쪽)와 아파치 전사들. 1886 / 덴버 디지털 컬랙션

C. S. 플라이, 제로니모(오른쪽)와 아파치 전사들. 1886 / 덴버 디지털 컬랙션

백인들에게 추방당하기 전에 찍힌 아메리카 인디언 사진이 하나 있다. OK목장의 결투가 벌어졌던 애리조나 툼스톤의 사진사 C S 플라이가 포착한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의 사진이다. 플라이는 1886년 3월 제로니모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로스엠부도스 협곡으로 떠나는 조지 크룩 장군의 군대와 동행했다. 사진에 찍힌 제로니모의 모습은 우리가 알던, 화려한 독수리 깃털 머리장식을 두른 아파치족 전사가 아니다. 짙은 색의 양복 상의를 걸쳤다. 다른 아파치 전사들도 소매 없는 재킷을 걸쳤다. 인디언이 보호구역으로 쫓겨나기 전, 다시 말해 백인들과 전쟁을 벌이던 19세기 말의 인디언은 이미 그들의 전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커티스, 루즈벨트 대통령 취임식 전날의 제로니모. 1905 / 미국 의회도서관

에드워드 커티스, 루즈벨트 대통령 취임식 전날의 제로니모. 1905 / 미국 의회도서관

포로가 된 노년의 제로니모는 백인들의 구경거리였다. 1898년 오마하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 제로니모는 다른 아시아의 원주민들과 함께 살아 있는 볼거리로 전시됐다. 카우보이의 서부 개척 드라마를 다룬 활극 <와일드 웨스트 쇼>의 연출가들은 그를 “가장 나쁜 인디언”으로 출연시켰다. 독수리 깃털 머리장식을 한 제로니모는 버펄로를 사냥하고 백인들의 머리가죽을 벗겨 냈다. 1905년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대됐다. 말을 탄 제로니모는 축하 퍼레이드 선두에 섰다. 한때 적군이었던 백인들의 최고사령관을 호위하는 아파치 전사의 모습은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완전한 승리를 선전했다. 루스벨트 취임식 전날, 에드워드 커티스는 제로니모를 사진에 담았다. 그때까지 지워지지 않은 눈가의 총흔. 담요를 두른 노년의 인디언 전사는 퀭한 눈빛으로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 백인들은 항복하면 고향으로 보내주겠다던 제로니모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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