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1년

“탱크 상대로 물러서지 않은 기세…우리는 생각보다 강했다”

키이우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① 그들은 왜 총을 들었나 - 두 번째 입대한 예능 PD 니콜라이

[우크라 전쟁 1년] “탱크 상대로 물러서지 않은 기세…우리는 생각보다 강했다”
[우크라 전쟁 1년] “탱크 상대로 물러서지 않은 기세…우리는 생각보다 강했다”

노보라드 볼린스키, 리시찬스크, 이지움, 바흐무트…. 니콜라이 코발(39)이 지난 1년간 거쳐온 전장들이다. 키이우 방어전부터 하르키우 수복전까지, 우크라이나 전황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가 있었다.

지난 18일 만난 니콜라이는 군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강건한 표정과 절도 있는 태도가 영락없는 베테랑 군인의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의 원래 직업은 방송국 예능 PD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번째 군 생활을 하게 된 니콜라이 코발이 지난 18일 키이우의 한 식당에서 자신이 겪은 전쟁 1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번째 군 생활을 하게 된 니콜라이 코발이 지난 18일 키이우의 한 식당에서 자신이 겪은 전쟁 1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니콜라이의 전쟁은 2022년 2월24일이 아니라 2월20일에 시작됐다.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진 날이다. 군복무 경험이 있는 그는 다가올 전쟁을 예감하고 17일부터 일찌감치 짐을 싸놓았다.

2월24일 새벽 3시부터 시작된 미사일 폭격 소리에 잠을 깼다. 벨라루스 접경 지대에 있던 그의 원소속 부대가 사실상 러시아군에 전멸당해, 새로 편성되는 부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러나 부대에 도착한 후 마주친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부대원 30명 중 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를 포함해 단 2명뿐이었다. 그는 그때 영화 <300>에 나오는 전투사들처럼 ‘존엄한 마지막 싸움’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급조된 부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임무는 그저 민간인들이 피란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싸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군 맞서 키이우 방어
보병들 수류탄 던지며 버텨
러 탱크들 진격 막히자 철수
하르키우 수복도 성공시켜

“러,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
무기 더 갖추면 승리할 것”

첫 전투에서 맞닥뜨린 건 러시아 탱크 16대였다. 이쪽은 보병과 포병뿐이었다. 니콜라이는 “솔직히 정말 무서웠다”고 했다. “탱크에서 포를 쏘는 속도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보병, 포병들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 모두에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탱크로 밀어붙이면 보병들은 도망을 가야 하는데, 앞쪽의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서도 누구 한 명 물러서지 않고 정위치를 지킨 채 수류탄을 던지며 전진한 것이다.

기세에 질린 러시아군은 진격하지 못했다. 니콜라이는 그때 처음으로 “우리는 생각보다 강하고, 적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결국 러시아군은 4월 초 키이우에서 철수했다.

러시아군은 전세를 재정비해 돈바스로 병력을 집중했다. 우크라이나군도 병력을 돈바스로 대거 보내면서 니콜라이 역시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키이우 인근과 분위기가 달랐다. 키이우의 시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군의 위치 정보까지 몰래 보내준 데 반해, 8년째 전쟁에 시달리던 돈바스 주민들은 우크라이나군을 보고서도 냉담했다.

전쟁에 아예 엮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느 쪽이든 일단 군대가 나타나면 포격과 폭격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시작된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냉소와 환멸이 번지고, 러시아군의 전면 침공 이후로는 지역 전체가 초토화되고 있는 것이 돈바스의 현실이었다

그는 “그들도 우크라이나 국민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인으로서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왜 목숨을 내던져야 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무렵 돈바스 전선에까지 들려온 ‘부차 학살’ 소식은 그의 모든 걸 바꾼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 살고 있던 부대원 동료의 아내와 세 살, 다섯 살 난 아이들도 피란 도중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됐다.

그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며 “전쟁에 대한 생각이 다시 한번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군인들은 승리를 더욱 강렬하게 원하게 됐다. 일반 시민들도 ‘어떠한 협상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완전한 이정표”라며 “우리에게 이제 다른 길은 없다”고 말했다.

<b>생사기로의 이별, 언제쯤 끝이 날까</b>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와 돌아오는 기차 주변에는 늘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소총을 어깨에 멘 한 군인이 연인과 헤어지기를 아쉬워하고 있다.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생사기로의 이별, 언제쯤 끝이 날까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와 돌아오는 기차 주변에는 늘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소총을 어깨에 멘 한 군인이 연인과 헤어지기를 아쉬워하고 있다.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니콜라이는 이후 돈바스 지역을 떠나 지난 8월 하르키우 수복작전에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노보라드 볼린스키에서 교전했던 러시아 부대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 러시아 쪽에는 10대의 탱크가 있었고, 우리는 또 보병이었습니다. 우리 부대는 100명 중 30명만 살아남았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투 사흘째가 되니 러시아군은 탱크를 잃는 것이 두려워 물러났죠. 결국 우리가 다시 해냈습니다.”

그는 하르키우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친 경험은 우크라이나 국경 내에서 러시아군을 쫓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무기만 갖추면 우크라이나군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병력이 더 많으니까 우리에게는 정말 더 많은, 많은 무기가 필요합니다.”

<취재 도움: 다큐앤드뉴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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