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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 영광 꿈꾸지만…손오공은 ‘디지털 원기옥’을 나눠 줄까

박용하 기자

‘거장’ 도리야마 떠나보낸 ‘만화 종주국’ 일본은 지금

지난 10일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미네르바 회전목마 근처에 모인 수천명의 <드래곤볼> 팬들이 만화 속 ‘에네르기파’ 동작을 따라하며 작가인 도리야마 아키라를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10일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미네르바 회전목마 근처에 모인 수천명의 <드래곤볼> 팬들이 만화 속 ‘에네르기파’ 동작을 따라하며 작가인 도리야마 아키라를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1990년대 ‘망가’ 황금기
애니메이션 세계적 선풍

출판 → 디지털 중심 이동
업체들 과도기 대응 실패
웹툰 유통서 한국에 밀려

정부 차원 ‘부흥’ 움직임
창작자 전폭 지원 등 검토

아르헨티나의 한 <드래곤볼> 팬이 지난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도리야마 아키라 추모 행사에서 만화 속 주인공인 ‘베지터’로 변장한 아들을 안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한 <드래곤볼> 팬이 지난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도리야마 아키라 추모 행사에서 만화 속 주인공인 ‘베지터’로 변장한 아들을 안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0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집결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이들이 취한 자세는 유명 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기술 ‘원기옥’의 준비 동작. 이 만화의 작가인 도리야마 아키라가 별세한 사실이 이틀 전 알려지자,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팬들이 모여 만화 속 명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지구인들아, 나에게 힘을 나눠 줘.” 만화 속 주인공 ‘손오공’의 부탁에 화답하듯 이들은 다 함께 손을 들었고, 자신들에게 추억을 선물한 작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했다.

<드래곤볼>과 일본의 향수

이날 도리야마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린 것은 아르헨티나뿐만 아니었다. 브라질, 멕시코 등 과거 <드래곤볼>이 흥행한 다수의 남미 국가에서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이어졌다. 중국과 프랑스에서는 정부 차원의 추모 성명이 나왔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도리야마의 별세를 애도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에게 직접 받은 사인을 공개했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드래곤볼이나 신룡의 힘으로도 고인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도리야마의 별세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이어지면서, 일본 내에서는 1990년대 일본 만화가 누린 세계적인 ‘콘텐츠 파워’를 그리워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도리야마는 일본 만화가 ‘망가’로 불리며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계기를 마련한 선구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드래곤볼>은 2022년 기준으로 세계 80여개국에서 총 2억6000만부 이상의 발행 부수를 기록했고,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2차 저작물로도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이후 일본의 다른 작품들도 보다 쉽게 해외에 소개될 수 있었다.

다만 <드래곤볼> 시대의 영광이 화려했던 만큼, 일각에서는 예전과 달라진 만화 시장 상황을 근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만화 시장의 대부분은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는데, 웹툰 등 새로운 시장에서 일본은 한국 등 해외 도전자들과 쉽지 않은 대결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리야마의 부고로 인해 콘텐츠의 보고로서 일본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지만, (만화)산업 기반의 취약성도 눈에 보이는 상황”이라며 “기회를 살리려면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만화가 가져온 지각 변동

[사이월드]‘드래곤볼’ 영광 꿈꾸지만…손오공은 ‘디지털 원기옥’을 나눠 줄까

만화산업은 크게 출판 만화와 디지털 만화로 나뉜다. 과거에는 잡지나 단행본 위주의 출판 만화가 주류였으며, 일본에서는 대형 출판사인 ‘쇼가쿠칸’과 ‘고단샤’ ‘슈에이샤’ 등이 이를 주도했다.

슈에이샤의 ‘주간 소년점프’는 <드래곤볼>이 연재되던 1994년 주간 발행 부수가 최대 653만부에 달해, 이 분야에서 기네스북에 오른 바 있다. 일본 만화의 황금기라 할 만한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해외 진출도 활발했다. 일본 만화는 1980년대부터 애니메이션화를 통해 세계로 진출했으나,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드래곤볼>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들이 한국과 중국, 프랑스 등 해외로 판매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에서는 ‘발간되는 그림책 2권 중 1권이 일본 만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일본의 ‘만화 종주국’ 지위를 위태롭게 했다.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일본이 강자로 군림하던 출판 만화 시장이 시들해진 것이다. 일본의 출판 만화 시장은 1995년 최고점을 기록한 뒤 버블 경제 붕괴와 10대 인구 감소로 인해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출판 만화를 대신해 웹툰 등 디지털 만화가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으나, 일본 업체들은 과도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로운 시장에서 치고 올라온 것은 한국계 업체들이었다. 라인·카카오저팬·NHN저팬 등은 독자들이 읽기 편한 방식과 무료 읽기 등을 도입하는 등 공세적인 전략으로 디지털 유통 시장을 선점했다. 모바일 데이터 분석 기업인 ‘센서타워’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만화 애플리케이션(앱) 매출 1위는 카카오의 일본 자회사인 ‘카카오픽코마’였다. 이어 네이버 자회사 ‘라인망가’, ‘네이버웹툰’, ‘카카오페이지’ 순이었다. 일본의 만화 앱 시장도 한국이 장악했다. 카카오픽코마는 2020년 7월부터 줄곧 일본 내 디지털 만화 플랫폼 점유율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통을 한국계 업체가 주도하다 보니, 개별 웹툰 작품들의 인기 순위에서도 한국 작품들이 두각을 보이고 있다. 카카오픽코마에서는 <나 혼자만 레벨업> 등 국내 작품들이 인기 순위 상위권을 점유하는 경우가 흔하고, 라인망가에서는 지난해 거래액과 조회 수 등을 합한 종합순위 10위 중 7개가 한국 작품이었다. 일본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한국계 만화 앱에서 유통되지 않으면 ‘대박’이 어려운데, 여기에 들어가도 톱 화면에 작품을 올려 힘을 실어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한숨이 나온다.

만화 시장에서 일본의 새로운 라이벌은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차례로 강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아마존과 애플이 웹툰 유통시장에 뛰어들어 업계 전체를 흔든 바 있다.

중국에서는 만화 앱 ‘콰이칸’이 자국산 웹툰을 대량 유통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출판 만화에서 디지털 만화로의 변화는 세계 최고라 자부해온 일본 제작 인력들의 역량도 시험대에 올렸다. 종이 만화의 제작이나 편집 노하우가 웹툰에 통용되지 않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교도통신의 오가와 유스케 기자는 저서 <만화의 미래>에서 “손재주가 있는 일본인은 펜으로 하는 작업에서는 바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게임 일러스트나 애니메이션과 미묘하게 다른 웹툰 특유의 채색을 해낼 수 있는 즉시 전력감의 인재는 아직 수가 적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본 웹툰 제작업계에서는 한국의 유명 작품을 교과서처럼 한 컷씩 분해해 연출이나 채색, 그림 효과 등을 넣는 기술을 세밀하게 해석해 자신들의 작품에 가져오는 풍조도 생긴 것으로 전해졌다. 오가와 기자는 “그간에는 가전 등의 영역에서 한국이 일본의 기술력을 흡수해 따라잡아 왔는데, 일본의 장기인 만화에서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니”라며 아쉬워했다. ‘일본식 만화의 인기작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업계에 들어온 현지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사기 저하도 나타나고 있다.

‘재비상’ 꿈꾸는 일본

콘텐츠 시장에서 격돌이 치열해지며 일본 내에서는 이 분야의 경쟁력을 다시 다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은 지난해 발간한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2023’ 보고서에서 “과거 쌓아온 일본발 콘텐츠는 환경 변화와 각국의 성장 속도에 억눌려 기존의 지위를 잃을 위기에 노출돼 있다”며 “세계 시장의 급속한 확대와 일본 시장의 축소라는 기회와 핀치의 경계선이 눈앞에 있다”고 강조했다.

게이단렌은 정부 차원의 콘텐츠 전략을 재고해야 한다는 제언도 내놨다. 앞서 일본 정부는 만화를 비롯한 콘텐츠 산업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2010년 6월 문화산업 육성을 위한 ‘쿨 저팬’ 전략을 추진한 바 있다. 한국의 ‘한류’나 ‘K콘텐츠’가 세계를 휩쓴 것처럼 일본의 문화 콘텐츠를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10년 넘게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전략적 대응이 불충분하고, 단기적인 성공 사례만을 강조하며 창작자를 비롯한 인적 자원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콘텐츠가 디지털 시대의 명운을 쥔 산업이라는 인식이 희박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일본 정부는 최근 정책을 정비하며 자국 콘텐츠의 해외 진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디지털 콘텐츠 창작자들에게 제작 시 필요한 기술적 지원을 하고, 적정 임금 등 노동 환경도 정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의 해외 거점에 콘텐츠 산업과 관련된 전문 인력을 배치해 해외 현지의 창작자나 기업을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일본에서는 그간 한국콘텐츠진흥원처럼 해외의 콘텐츠 지원 거점을 정비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콘텐츠 시장에서의 재비상을 꿈꾸는 일본에 최근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수상 소식은 적잖은 자극제가 됐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받고, 영화 <고질라 마이너스 원>이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거머쥐며 일본 콘텐츠의 여전한 경쟁력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이번 수상과 관련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예술로 인정받은 지 오래임을 새삼 상기시키는 봄”이라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을 접하며 자란 사람들이 아직 세계에 많이 있다”며 “지금이 (콘텐츠 산업이) 일본의 전략 산업으로 기반을 굳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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