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고 되새겨도 뭔가 어색하다. “정치 생명을 걸고 세종시를 지켰다.” 박근혜 후보의 말이다. 박 후보가 세종시에 애착을 갖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지켰다고…, 아니 누구로부터 지켰지? 세종시를 흔든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 대통령은 새누리당 소속이다.
박 후보는 책임정치를 중시한다. “말 바꾸고 책임 안 지는 정치에서 약속 지키고 책임지는 정치로 바꿔야 한다.” 지난 27일의 언급이다. 책임정치의 주체는 정당이다. 세종시를 부정하려 한 것은 새누리당 소속의 이 대통령이니 같은 당 소속의 박 후보로서는 지켜냈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책임정치 차원에서 미안해야 한다. 그게 마땅한 도리다.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은 또 있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가장 큰 쟁점은 신행정수도 이전이었다. 신행정수도는 지금의 세종시보다 규모만 컸을 뿐 기본 개념에서 둘은 같다. 당시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였다. 그런 사람을 박 후보가 나서서 당에 영입했다. 세종시를 지켰다는 사람이 그걸 극구 반대한 사람을 삼고초려해서 영입하니 이건 또 뭔가 싶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럴 때에 통상 하는 머쓱한 사과도 없다. 이런 걸 두고 후안무치라고 하는 것일 게다.
박 후보는 재래시장을 자주 찾는다. 재래시장을 찾을 때면 민생을 강조한다. 서민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들고 나오는 스토리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민생을 외면하고 이념에 몰두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정당의 후보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평가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이명박 정부가 민생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에 대해선 왜 아무런 말이 없을까. 이 정도는 돼야 민생 운운하는 그의 외침에 진정성이 느껴질 것이다.
노 정부가 끝난 지 5년이 지났다. 그러니 5년 전의 노 정부에 먹고 살기 힘든 2008~2012년 삶의 책임을 묻는 건 통 큰 용기, 또는 간 큰 무지다. 노 정부 때보다 이 정부 들어 민생이 더 나빠진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 때문에 박 후보도 지난 총선 때 당명까지 바꿔가면서 차별화 쇼를 펼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와서 5년 전의 정부를 탓하는 ‘노무현 때리기’에 나선 것을 보면 이거야 말로 ‘이-박 담합’이 아닌가 싶다. 이러면 박근혜가 설사 이기더라도 MB정부 2기가 될 것이다.
박 후보가 즐겨 쓰는 말이 민생이다. 민생을 앞세우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박 후보의 민생은 면피용 주술 같다. 박 후보가 이끄는 새누리당이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에 제동을 걸었다. 개정안은 대형마트 등의 영업시간을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로 현행보다 4시간 줄이고 의무 휴업일을 매월 최대 3일로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개정안은 11월16일 해당 상임위(지식경제위원회)를 통과하면서 22일 본회의에서 의결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법사위에서 법안처리를 막았다. 마땅한 이유도 없어 보인다. 와중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얼마나 속이 탔으랴. 전통시장 상인을 비롯한 중소상인들로 구성된 전국상인연합회가 나서 지난 달 27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법 개정안의 정기국회 회기 내 통과를 촉구했다. 당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당의 후보는 염치가 없는지 아니면 모르는지 또 민생을 거론한다. 이쯤 되면 민생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둔사(遁辭)일 뿐이다.
박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폐족의 실세라고 비판했다. 임기 후반에 비서실장을 지냈다고 실세라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5년이나 한 박 후보는 유신독재의 2인자라고 해야 하리라. 게다가 박 후보의 이런 자세는 스스로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2월15일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묶이고, 과거를 논박하다 한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가는 선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전진하는 총선이 돼야 한다.” 총선에서는 미래로 가자고 해놓고, 대선에서는 과거로 달려가고 있다. 이게 약속을 지키는 책임정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