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다 지하방 사람만 수해… 없이 사는 게 죄인가 봐요”

정환보·조미덥 기자

‘기습폭우로 쑥대밭’ 서울 화곡·신월동 복구 현장에선…

“죄다 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걸 보니 ‘없이 사는’ 게 죄인가 봅니다.”

양철상씨(53·서울 신월1동)는 23일 물이 빠진 지하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추석 전날 들이닥친 기습폭우로 명절을 쇠기는커녕 잠잘 곳마저 잃어버린 터다. 그는 심한 허리디스크로 일을 할 수 없는 기초생활수급자다. 복구작업도 경기 일산에 사는 동생이 와서 거들고 있다. 양씨는 “정부가 주는 월 40만원가량에 의지해 생활해왔는데 앞으로 살림살이를 어떻게 다시 마련할지 막막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과 양천구 신월동 주민들은 지난 21일 쏟아진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봤다. 대부분 다가구주택의 지하 또는 반지하층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틀 동안 밤을 새워가며 집을 정돈했지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주택가의 물은 대체로 빠진 상태지만, 빌딩 지하층이나 주차장 등에는 아직도 물이 가득 차 배수펌프를 돌리고 있었다.

화곡1동 주민 정종순씨(70·여)는 “물이 갑자기 들어차는 바람에 준비하던 차례 음식을 내팽개치고 반지하방에서 창문으로 탈출하듯이 빠져나왔다”고 했다. 이틀 밤을 인근 모텔에서 보냈다는 정씨는 “폭우가 내린 당일 119에 몇차례 전화했지만 ‘알겠습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만 하루가 지나서야 도우러 오더라”라고 했다. 그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영세민인데 앞으로도 물난리가 나면 그때마다 같은 피해를 반복해야 하는 건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옆집 주민 박일규씨(38)는 “연세 많은 어머니가 걱정하실까봐 추석날에도 ‘잘 있다’는 전화만 하고 침수 피해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피해 지역을 다녀갔지만 주민들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다. 골목 어귀에 삼삼오오 모인 주민들은 성토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월1동의 유영선씨(51)는 “21일 오후 2시쯤 도로가 물에 잠기면서 물이 허리춤까지 들어찼고 그 이후에도 계속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오후 5시쯤 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더라”라며 “하수처리시설 쪽에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피해액에 턱없이 모자라는 보상액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과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화곡동 저지대 도로변에 위치한 ㄷ철물점 대표 강한진씨(57)는 “7년 전쯤 홍수 피해를 본 뒤 지하창고 입구에 합판으로 된 벽을 설치해 놓아 그나마 피해를 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게 앞에 놓아둔 철사더미와 건축 철골 자재는 모두 녹슬어 있었다. 그는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피해 보상을 해준다고 하지만, 늘 형식적인 수준이다. 개인이 알아서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며 씁쓸해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이번 집중호우로 1만4018가구가 침수되고, 1만191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하수관거와 펌프시설의 용량 기준을 현재의 ‘10년 빈도 최고 강수량’(시간당 75㎜)에서 ‘30년 빈도 최고 강수량’(시간당 95㎜)으로 늘리기로 하는 등 긴급대책을 마련했다. 강서·양천구 등에는 빗물펌프장 41곳과 지하 저류조 8곳을 증설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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