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는 지금 죄입니다, 계속 죄입니까

박송이 기자

낙태 얘기 못하는 한국, 64년째 제로섬 게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가 지난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얼굴에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페인팅을 하고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뒤편으로 낙태죄 폐지 메시지가 쓰인 여성의 몸 사진이 보인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가 지난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얼굴에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페인팅을 하고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뒤편으로 낙태죄 폐지 메시지가 쓰인 여성의 몸 사진이 보인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그럼, 당신은 낙태를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낙태죄 폐지 논쟁은 언제나 이 질문 앞에 멈춰 선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 윤리적으로 무엇이 더 우선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질문 앞에서 낙태는 두 가치가 서로 대립하는 제로섬 게임이 돼버린다.

한국은 낙태가 법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나라다. 임신부에게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때, 유전적 질환이 있을 때, 강간·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일 때 등에만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 이외의 사유로 낙태를 한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고 낙태 시술을 한 의료진은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경제적인 이유 등을 포함해 연 17만~35만건의 낙태가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낙태죄’(형법 제269·270조)는 1953년 제정된 순간부터 64년 동안 줄곧 ‘사문화’된 상태와 다름없다.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 3명은 지난 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낙태한 여성에게 ‘불법’ ‘걸레’ ‘창녀’라는 낙인을 찍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의 경험을 털어놓기 힘들었다”면서 “그러나 낙태는 누구에게나 한 끗 차이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수술할 병원을 찾지 못해 정보를 알음알음 검색해야 하고, 수술을 받으면서 부작용조차 물어보지 못했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현행법은 낙태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는다. 하지만 낙태를 하고 싶어서 하는 여성은 없다. 피임을 거부하는 남성, 혼전 임신에 대한 사회적 낙인, 감당하기 어려운 양육비용 등 한 건 한 건의 낙태에는 여성 개인의 결정 권한을 넘어서는 훨씬 복잡한 사회적 함수가 숨어 있다. 이 모순들을 풀어내지 않은 채 반복되는 제로섬 게임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공존할 수 없게 한다.

외국의 낙태 정책들은 낙태가 이분법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임신 24주 이내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낙태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적극적인 상담과 숙려기간 도입, 체계적인 양육지원 시스템 등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는 낙태에 대한 ‘허용’과 ‘금지’라는 틀을 넘어 사회가 임신과 출산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청원에 한 달 동안 23만명 이상이 참여했다. 청와대가 조만간 공식 답변을 하기로 한 가운데 헌법재판소 또한 낙태 처벌조항인 형법 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의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남석 신임 헌법재판관은 지난 9일 인사청문회에서 낙태죄 폐지에 대해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 보호받아야 하지만 임신 초기 단계에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의 자기결정권도 존중돼야 한다”고 말해 낙태죄에 대한 전향적인 검토를 시사했다. 낙태죄 폐지 논란이 새롭게 점화되는 가운데 제로섬 게임을 넘는 생산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 ‘생명권 - 자기결정권’ 이분법에 여성을 가두다

>>낙태죄 폐지 논쟁이 빠져 있는 함정

지난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가는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낙태죄 폐지 시위 모습이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낙태죄 폐지 촉구 메시지가 쓰여 있는 여성의 몸과 얼굴 사진을 들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지난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가는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낙태죄 폐지 시위 모습이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낙태죄 폐지 촉구 메시지가 쓰여 있는 여성의 몸과 얼굴 사진을 들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1953년 만들어진 ‘낙태죄’(형법 제269·270조)는 태생부터 사문화된 법이었다. 1950년대 생활상을 담은 책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삐라 줍고 댄스홀 가고>(강성현 외, 창비)에 따르면 그 시대 전체 가임여성의 35%가 낙태 시술을 한 번 이상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식구들의 입을 줄이는 것이 절박했던 당시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불법 낙태수술이 만연해 생활고와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받는 미혼여성, 미망인, 기혼여성 등이 정식으로 허가받은 병원인지도 알 수 없는 초라한 산부인과를 드나들었다.”

이후에도 낙태죄는 이름만 유지한 채 명맥이 이어져 왔다. 1960년부터 1996년까지 펼쳐진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으로 낙태는 공공연히 장려됐다. 지금도 연 17만~35만건의 낙태가 이뤄지고 있다고 추정된다.

■ ‘사문화’된 낙태죄를 둘러싼 싸움

지난 9월30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청원에 한 달간 23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법과 현실 간 괴리가 큰 만큼 사문화된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계를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사문화된 법을 폐지할 게 아니라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2009년 출범한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대표적이다. 낙태에 반대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모임인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낙태신고센터를 개설하고 낙태수술을 한 병원을 고발하는 등 낙태 처벌 강화 운동을 펼쳐왔다.

지난 2일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낙태죄 폐지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51.9%,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36.2%였다. 폐지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은 가운데 청와대가 청원에 어떤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을지 주목되고 있다. 특히 답변 책임자 중 한 명인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2013년 발표한 논문 ‘낙태 비범죄화론’에서 “모자보건법 제정 후 40년이 흐른 지금, 여성의 자기결정권 및 재생산권과 태아의 생명 사이의 형량은 새로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학자적 소신과 민정수석으로서의 입장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전 정부보다는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온다.

■ 정치적 쟁점화될까

ⓒ 한국여성민우회·혜영

ⓒ 한국여성민우회·혜영

지금까지 한국에서 낙태죄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미국의 경우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낙태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지가 첨예한 쟁점이 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간혹 낙태죄 개정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기도 하지만, 대개가 기간 만료 등으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낙태죄 개정을 전면 거론하게 되면 종교계 등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하기 때문에, 드러내서 이슈를 키우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하게 사문화된 상태로 두는 편이 나은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 사태 이후 낙태시술 병원이 급감하자 일부 여성들이 중국 원정 낙태까지 감행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사문화된 법은 언제든 되살아나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현재 낙태죄 폐지 청원에 23만명 이상 참여하면서 국민적 관심사가 된 만큼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더 미룰 수 없게 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제껏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었는데 이를 계기로 논의를 시작한다는 것만 해도 큰 진척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 ‘제로섬 게임’이 된 낙태죄 폐지 논쟁

낙태죄 논의는 ‘제로섬 게임’처럼 다뤄져왔다. 한쪽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며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태아의 생명권이 축소된다고 반발했다. 낙태죄 존치를 거론하며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시하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무시됐다. 2012년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제로섬으로 대립한 대표적 사례다. 당시 8명의 헌법재판관들은 낙태 처벌 조항을 놓고 합헌 4, 위헌 4로 팽팽하게 나눠졌다. 합헌의 근거로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가 제시됐다. “자기낙태죄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위 조항을 통해 달성하려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 반면 위헌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했다.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은 임부의 임신 유지 여부에 대한 자기결정의 영역을 전혀 존중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자기낙태죄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러나 낙태를 둘러싼 현실은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학적으로 태아를 언제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정된 견해는 없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의학적으로 수정 후 8주 이내는 배아라 하여 태아 이전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수태된 순간부터 생명체로서 존중을 하지만 언제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학적 견해는 없다. 단지 법학적인 설이 있을 뿐이며 의학적인 시각보다 사회적 합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국가에서는 배아도 인간 개체로 여기기 때문에 수정란 단계부터 생명권이 있다고 본다. 반면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에서는 24주 이내의 태아는 출생 시 생존능력이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 기간 내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낙태 허용 기한을 결정한다.

■ 낙태 금지가 곧 낙태율 감소는 아니다

[커버스토리 - 낙태죄 찬·반 ‘제로섬 게임’]낙태는 지금 죄입니다, 계속  죄입니까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해 낙태를 금지해도 낙태율이 감소하지 않고, 반대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낙태를 허용해도 낙태율이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태율은 단순히 불법이냐 합법이냐 여부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변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학부 교수는 자신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낙태를 전면금지한 루마니아에서 어떤 풍선효과가 발생했는지 분석했다. 루마니아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23년 동안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엄격한 낙태금지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출산율은 초반 3~4년 동안에만 반짝 증가했을 뿐 곧 다시 감소했다. 오히려 예기치 않았던 사회적 문제들이 터져나왔다. 고아원 등에 버려지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났고, 유아사망률도 높아졌다. 특히 모성사망비(임신 중 혹은 출산 후 7주 이내 사망하는 여성의 숫자)가 낙태금지법 시행 전보다 7배나 급증했다. 몰래 불법 시술을 받다가 수술사고나 합병증으로 사망한 여성들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임신 24주 이전까지는 낙태가 전면 허용되는 네덜란드는 낙태율이 인구 1000명당 9.7명(2010년)으로 상당히 낮은 편이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원은 “네덜란드는 법적으로 사회경제적 이유의 낙태까지 폭넓게 허용하지만, 낙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장치들이 잘 갖춰져 있다”면서 “낙태를 결정하기 전 의사 2인 및 사회복지사 등과 충분히 상담을 한 후 4~7일간의 숙려기간을 거친다. 낙태를 하지 않을 경우 받을 수 있는 사회복지 서비스 및 입양절차 등의 정보도 제공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낙태를 허용하더라도 여성의 임신과 출산과정에 적절히 개입하면 낙태율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 구도 벗어나야

지금까지 정부는 필요에 따라 낙태에 대한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왔다. 산아제한정책이 추진됐던 1960년대에는 ‘낙태수술버스’까지 존재했다. 저출산 문제가 대두되면서부터는 불법 낙태를 단속하고 출산을 장려하는 흐름으로 변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05년 논문 ‘범죄에서 권리로’에서 “낙태가 만연하는 것은 생명존중 사상의 부재가 아니라 임신을 할 수 있는 여성의 몸, 성, 자기결정에 대한 존중 사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낙태가 여성의 몸과 마음에 남기는 폐해가 사회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성평등한 피임 수행이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가족과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어머니 조건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3만명의 청원으로 출발한 낙태죄 폐지 논의에 국가의 저출산 대책이나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의 이분법적 윤리를 넘어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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