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의 용맹정진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주변의 모든 것이 정지 화면처럼 느껴진다. 스님들이 선원 대방에 모여 앉아 참선하고 있다. 관례대로 구참 수좌 스님들은 벽을 따라 나란히 앉아 있고, 신참인 사미 스님들은 방 중간에 앉아 정진한다. 어린 10대의 사미승들이 노스님들 바로 앞에 좌복을 깔고 앉아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도 진풍경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스님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같은 공간에서 화두를 들고 저마다의 치열한 정진을 이어간다. 때때로 들리는 죽비소리만이 그 적막을 깨뜨린다. 자기도 모르게 살짝이라도 졸았다가는 어느새 어깨 위에 죽비가 서늘한 느낌을 담아 올려진다. “타다다 탁” 리드미컬한 움직임 속에서 힘껏 죽비가 내려쳐진다. 사실 죽비는 스님들의 정진을 경책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소리만 요란할 뿐 아픈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정진하는 대중들 모두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할 정도로 효과가 크다. 그렇게 스님들이 졸음과 더위 속에서 화두를 들고 분투하는 가운데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이레째를 맞이하면서 용맹정진은 마무리된다.

해인사에서는 오래전부터 하안거와 동안거에 ‘용맹정진(勇猛精進)’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안거 중에 용맹정진 시기가 되면 대중 스님들은 각자의 소임 처에서 하던 일들을 일시 중지하고, 선원에 모여 집중적으로 참선 정진하게 된다. 소임뿐만 아니라 번다했던 개인사도 이 기간만큼은 일단 멈춤이다. 열심히 정진했던 스님들은 한층 가행정진하고 그간 화두 참구를 소홀히 했던 스님들은 이 시기를 빌려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용맹정진 기간이 되면 총림 전체에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흐른다. 용맹정진 동안의 엄격한 선원 규율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님들이 출가할 당시의 결의와 본분사를 되새기면서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혼자서 일주일간 수면시간 없이 정진하라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정진이 대중 스님 여럿이 한자리에 모여 같이하면 그래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절집에서 흔히 말하는 ‘대중의 힘’이다. 그렇게 용맹정진은 개인 수행의 진전은 물론 공동체의 결속과 유대를 확인하는 장이기도 하다.

엊그제는 용맹정진을 마치고 승가대학으로 돌아온 어린 사미 스님의 피곤함에 지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과거 학인 시절 용맹정진에 동참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건강했던 시절이었지만, 좌복에 앉기만 하면 무릎이나 다리, 허리는 왜 그리 아픈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익숙지 않은 자세로 용을 써가면 일주일을 앉아 있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우스웠던 기억은 당시 10대의 어린 도반 스님 둘이 쉬는 시간에 지대방에서 나눈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서로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면서 “예전엔 할 만했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힘들다”면서 서로를 챙겨주고 격려하는 모습이 우습고 귀여웠다. 한참 잠이 많을 나이에 졸린 눈을 부릅떠가면서 꼬박 참선하려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슨 인연으로 이른 나이에 불문으로 들어섰는지 새삼 신기하기도 하다. 그래도 한철 용맹정진을 마치고 나면, 왠지 눈빛은 더욱 형형해지고 부쩍 성장하고 깊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행에 대한 막연함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산문 밖에서 사람들이 막연히 스님들에 대해 생각할 때, 으레 나이가 지긋한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전통 사찰 승가대학에는 적지 않은 젊은 스님들이 산사에서 수행하고 있다. 과거만큼 많은 수는 아니지만, 각자의 인연 따라 끊길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고 청년들이 젊은 날의 고뇌를 뒤로하며 산문으로 들어선다. 산문 밖의 사회적 기준으로는 ‘MZ세대’에 속하는 스님들은 어려서부터 디지털에 익숙하고, 트렌드에 민감해 승가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도, 자신들만의 개성대로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다.

세상은 인공지능(AI)이 상용화되고,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으로 약 260억년 전의 심우주마저도 관측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MZ 스님들은 오래된 질문들을 화두 삼아 산문을 지키고 있다. 그 모든 변화가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그 마음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지에 관해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한다. 이제 하안거 해제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여전히 날씨는 무덥고 가을은 아직이지만, 구도 열정을 가슴에 품고 진리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젊은 학인 스님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담아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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