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심·본심 통합으로 진행된 올해 심사에서 본심에 오른 작품은 총 아홉 편이었다.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고 저마다 개성이 분명하여 심사위원들을 기쁜 한편 곤혹스럽게 한 그 작품들 가운데 끝까지 논의된 것은 다음 세 편이다.
‘개와 개인’은 엄마를 일찍 여읜 이십대 화자가 엄마 역할을 하던 할머니의 입원 이후 어린 동생을 돌보는 일까지 떠맡고 그 와중에 반려견마저 병으로 떠나보내는 이야기이다. 이 상실감 가득한 서사를 작가는 시종 담백한 문장으로 기술한다.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이 결국 세상에 ‘같은 문제’란 없고 ‘고작 개 한 마리’의 죽음이 가진 무게를 측량하는 일 또한 가능하지 않음을 독자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확인시켜주는 필력이 미덥다. 다만 무난하게 잘 쓰인 소설임에도 그 무난함이 여타 응모작들을 압도할 만한 장점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좌초Stranding’는 존재론적 고독에서 죽음으로 해방되는 한 노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야기의 집이면서 사유의 집이고 동시에 언어의 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존재론적 각성에 대한 묵직한 통찰, 유려하고 기품 있는 문장들이 이 작가의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강지희 평론가는 “죽음 앞에서 삶의 시간을 팽창시켰다가 인간 너머의 기원으로 수축해 들어가는 팽팽한 힘이 지닌 서사적 무늬가 아름다워 눈을 떼기 어려운 작품”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일부 번역투 문장들의 어색함과 백과사전식 정보의 조합이 주는 익숙함은 이 작품이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i’의 화자는 하루에 수십만개씩 포장용기를 옮기는 일을 하는 육체노동자이다. 그는 임신한 아내가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고 하자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한다. 이 서사에는 어떤 미학적 새로움도 독자적인 스타일도 재기도 패기도 없다. 그러나 그 이상 값진 것이 있다.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 혹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같은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작품이라는 것. 인간에 대한 연민이거나 사랑이거나 배려라고 할 수도 있을, 실은 우리 모두의 마음 어딘가에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그것을 이 작품은 화자의 정직한 목소리를 통해 점점 가시화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소설 초고에서 극대화한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다른 많은 미덕보다도 그 점에 매료되었다. 하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소설은 어쩌면 물성을 가진 의자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종일 앉을 새도 없고 앉을 데도 없이 서서 일하는 누군가에게 잠깐 앉아 쉴 의자를 마련해주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축하드린다. 새해 아침 이 따뜻한 소설이 심사위원들에게 그러했듯 독자들의 마음에도 온기를 전하기를 바란다. 아깝게 낙선했으나 소설의 무한한 가능성과 역량을 보여주신 다른 응모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