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사자 트로피를 받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올렸던 사람은…, 청계천에서 무거운 구리박스를 지고 다니던 열다섯 살의 내 모습이었습니다.”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그랑프리라는 영예를 안고 돌아온 <피에타>의 김기덕 감독(52) 손에는 구리박스가 아니라 빛나는 황금사자상이 들려 있었다. 11일 오후 귀국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 감독은 ‘언론 기피’에 가까웠던 과거와 달리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고 활달한 태도로 질문에 답을 이어갔다.
▲ “천만 넘은 영화, 기록 세우려 극장서 안 빠지고 있더라
중요한 제작비는 세상 보는 눈
이런 세계관 가진 영화들이 극장서 당당히 경쟁했으면 해
‘피에타’가 그 모델이 됐으면”
“베니스에서 상영 후 길을 못 걸어다닐 정도로 많은 관객들이 ‘<피에타>가 황금사자다’라는 말을 했어요.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 기자도 ‘시사 후에 산사태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기분이 좋고 붕 뜨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담이 컸습니다. 이렇게 올라갔다 추락하면 어떡하지, 떨어지면 아플 텐데 하는 마음도 들었어요. 그렇게 겸허하게 기다렸더니 수상이 사실이 되고, 현실이 되었습니다.”
김 감독과 함께 자리한 <피에타>의 배우 조민수(47), 이정진(34)씨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셔야 왜 황금사자상을 받았는지 알 텐데, 극장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수상에도 불구하고 블록버스터에 밀려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김 감독 역시 “<피에타>의 좌석 점유율이 꽤 높은 걸로 알고 있다”며 “보통은 회차나 상영관을 늘릴 텐데 천만이 넘은 영화가 기록을 내기 위해 극장에서 안 빠지고 있더라. 그게 바로 도둑들이 아닌가”라는 뼈있는 말을 던졌다. 이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요구했다. “가장 큰 제작비는 대기업의 돈이나 극장이 아니라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영화들이 멀티플렉스에서 당당하게 경쟁을 했으면 합니다. <피에타>가 그런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감독은 영화제 내내 화제가 됐던 낡은 가죽신과 고가로 알려진 갈옷에 대해서도 “아무도 질문 안 해주실 것 같다”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입은 옷이 상의가 150만원, 바지가 60만원짜리입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이야기쇼 두드림> 녹화를 가려는데 옷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지하철 타고 가던 중 인사동에 내려 30분 안에 고른 옷이에요. 나중에 가격을 듣고 큰일났다 했지만 녹화시간에 쫓겨 할 수 없이 샀습니다. 하지만 이 옷으로 베니스 폐막식에도 섰고 앞으로 1년 동안 열리는 모든 해외 영화제들에 이 옷을 입고 갈 겁니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입은 두꺼운 승복도 1년 내내 입었어요. 이 신발도 1년째 신고 다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비싼 옷 입었다고 비난하지 말고) 용서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1억5000만원의 제작비로 <피에타>를 찍었습니다. 이 정도 돈으로 제작이 가능한 건 제 힘이 아닙니다. 배우, 스태프들의 개런티가 없습니다. 아주 열악한 경우만 생활비 정도를 주는 식입니다. 하지만 <풍산개>(김기덕 제작)의 수익 10억원 중 5억원은 스태프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 남은 돈으로 <피에타>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다른 프로젝트들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김 감독은 “<피에타>에서 수익이 생긴다면 그 돈은 제가 제작하는 다음 영화에 투자될 것”이라며 대기업 투자를 받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설명했다. 또 “이것이 앞으로 감독과 영화인들이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며 “영화학교 출신이 아닌 사람들과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을 감독으로 데뷔시키고 함께 열정을 가지고 제도권 밖에서 영화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싶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김 감독은 베니스로의 출국 기자회견과 귀국 직전 기자들에게 보낸 e메일을 통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문 후보와 무슨 관계냐고요?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관계입니다. 그분은 공수부대, 저는 해병대를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선거에 더 깊은 개입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후보에 대한 지지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 훌륭한 삶을 살지 않아서 그분의 캠프에 참여하면 피해가 될까봐 더 다가가지 않고 여기까지만 가겠습니다.”
김 감독은 “이제 나에게 <피에타>는 맛있게 먹은 음식이고 소화되고 배설된 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똥이 거름이 되어서 또 다른 것들을 키우는 건 제 몫이 아니겠죠. 극장이 없다면 관객들이 극장을 요구해서 더 많은 관에서 상영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피에타>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보내고 저는 다음 시나리오를 쓸 겁니다.”
그는 차기작의 힌트도 던졌다. “외신기자들이 <피에타>가 대중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더군요. 내가 좀 변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작품도 분명 대중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락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 <피에타>와 관련한 어떤 인터뷰나 출연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단, 미리 약속드린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제외하고요(웃음). 이제 저는 다음 영화를 준비할 것입니다. (관객 여러분이 제가)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