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무대가 던지는 차가운 질문, 아크람 칸 ‘정글북 : 또 다른 세계’

선명수 기자

세계적인 안무가 아크람 칸 최신작

‘기후변화 이후의 세계’로 가져온 동화 속 이야기

대담한 안무·환상적인 무대 연출로 구현한

기후재앙에 대한 강력한 경고장

키플링의 동화 <정글북>을 기후변화 이후의 세계로 가져온 아크람 칸의 최신작 <정글북 :  또 다른 세계>의 한 장면. ⓒAmbra Vernuccio

키플링의 동화 <정글북>을 기후변화 이후의 세계로 가져온 아크람 칸의 최신작 <정글북 : 또 다른 세계>의 한 장면. ⓒAmbra Vernuccio

인간이 망치고 떠나버린 땅, 무대는 동물들의 세계다. 동물원과 실험실에서 탈출한 동물들은 인간들이 버린 도시를 점령해 이곳이 자신들의 땅임을 선포한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한 소녀가 홍수로 침수된 도시에 떠내려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녀를 발견한 늑대 무리는 그에게 ‘모글리’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고전 <정글북>이 새롭게 태어났다. 세계적인 현대무용단체 아크람 칸 컴퍼니의 <정글북 : 또 다른 세계>는 춤과 음악, 영상이 어우러진 무대를 통해 관객을 ‘기후변화 이후의 세계’로 데려다 놓는다. 연출과 안무를 맡은 아크람 칸은 인도 전통 무용 카탁(Kathak)과 현대무용을 접목한 독창적인 안무 스타일로 공연계의 찬사를 받아온 영국 출신의 안무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강렬한 춤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공동 제작으로 지난 4월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그의 최신작이다. 칸이 2020년 <제노스>를 마지막으로 무용수 은퇴를 선언한 뒤 연출자로 나선 첫 작품이다. 유럽 투어를 마친 뒤 LG아트센터 서울 개관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지난 18~19일 국내 관객과 처음 만났다.

안무가 아크람 칸. ⓒJean-Louis Fernandez

안무가 아크람 칸. ⓒJean-Louis Fernandez

기후재앙으로 폐허가 된 세계, 디스토피아에 그려낸 ‘정글북’

공연은 암전 속, 기후 재앙을 알리는 목소리들이 극장을 울리며 시작된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으니 높은 곳으로 향하라는 경고 방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막이 오른다. 바다가 땅을 집어삼킨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무대에 투사된 영상이 희미해지며 폐허가 된 도시로 떠밀려온 아이, 아이 주변에 모여든 동물들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낸다.

공연은 <정글북>의 세계를 울창한 정글이 아닌 근미래의 디스토피아 도시로 옮겨 놓는다.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모글리를 돌보는 표범 ‘바기라’와 동물원에서 탈출한 곰 ‘발루’,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원숭이의 우두머리 ‘반다르’, 동물세계의 인간 침입자 사냥꾼 등이 등장한다.

10세 때 현대 연극의 거장 피터 브룩이 연출한 <모글리의 모험>에 ‘모글리’ 역으로 출연했던 아크람 칸은 이 유명한 동화를 기후위기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담은 무용극으로 재탄생시켰다. 10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올라 늑대, 원숭이, 곰, 뱀 등 여러 동물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담은 춤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무용수들의 몸짓 위로 녹음된 내레이션과 무대 전·후면에 투사된 애니메이션 영상이 겹친다.

무대는 구석에 놓인 종이상자들 외에는 별다른 소품이나 세트 없이 거의 텅 비어 있다.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작품인 만큼, 아크람 칸은 작품을 만들며 세트를 최소화하고 가볍게 투어를 다닐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형태의 세트 대신 영상 투사를 적극 작품에 사용했다. 그의 전작 <데쉬>에도 참여했던 이스트컬처(YeastCulture)의 애니메이션이 폐허가 된 도시와 이곳을 유유히 지나가는 장엄한 코끼리떼의 모습, 무대를 가득 채우는 새떼들의 움직임을 드라마틱하게 구현한다.

아크람 칸의 무용극 <정글북 : 또 다른 세계>의 한 장면. ⓒStudioAL

아크람 칸의 무용극 <정글북 : 또 다른 세계>의 한 장면. ⓒStudioAL

아크람 칸의 무용극 <정글북 : 또 다른 세계>의 한 장면. ⓒAmbra Vernuccio

아크람 칸의 무용극 <정글북 : 또 다른 세계>의 한 장면. ⓒAmbra Vernuccio

“우리는 지구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차가운 현실 비추는 뜨겁고 대담한 무대

단순하면서도 동화적인 영상, 대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무용수들의 몸짓이 이 공연의 묘미다. 모글리가 단순한 선으로 구현된 거대한 코끼리와 조우하는 장면 등 안무와 영상이라는 이질적인 표현 방식이 하나의 시공간 속에 입체적으로 어우러지며 경이로운 장면들을 빚어낸다. 모두 같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동물 캐릭터에 맞는 의상이나 분장 없이도 오로지 몸짓만으로 감정과 서사를 만들어낸다. 영화음악 작곡가로 유명한 조셸린 푸크의 음악과 어우러진 공연 2부 무용수들의 강렬한 군무는 이 공연의 백미다.

아크람 칸은 이 작품을 자신의 딸과 미래 세대를 위해 만들었다고 밝혔다. 작품 속 기후 난민 ‘모글리’는 미래 세대의 표상이다. 아크람 칸은 ‘연출 노트’를 통해 “우리는 전례 없이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건 인류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종족들에게도 마찬가지”라며 “이 난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우리의 고향인 이 행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인류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배우기 위해 <정글북>이라는 이야기를 모든 문화권의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춤과 음악, 그리고 공연의 마법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메시지와 주제의식이 도드라진 공연이다. “우리는 모두 지구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다”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징한 메시지를 에두르지 않고 대담하고 환상적인 무대 언어로 구현했다. 공연은 인류가 초래한 재앙을 투명하게 비출 뿐, 섣부른 희망도 낙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용수들의 뜨거운 에너지로 가득 찬 작품이지만 무대가 던지는 인간 문명에 대한 질문은 더없이 차갑고 냉철하다. LG아트센터 서울에 이어 오는 23~24일에는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

[개관 페스티벌] 아크람 칸 컴퍼니 ‘정글북: 또 다른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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