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럽다” MZ세대 외면받는 하이힐, 왜?

이유진 기자

-여성성의 상징 하이힐 ‘팬데믹’ 기점으로 신발장 구석 신세

-‘나다움 주의’ ‘친환경 이슈’로 하이힐 시대 저물다

-하이힐, 여성성 아닌 젠더뉴트럴 개성 아이템으로 주목

여성의 상징이었던 하이힐이 이제 2030세대 여성에게 ‘촌스러운, 혹은 시대착오적 아이템’이 되고 있다. 왜일까? 사진 경향신문 DB

여성의 상징이었던 하이힐이 이제 2030세대 여성에게 ‘촌스러운, 혹은 시대착오적 아이템’이 되고 있다. 왜일까? 사진 경향신문 DB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기가 첫걸음마를 내딛듯 걷는 법을 다시 익혀야 했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자연스럽게 걷기. 구두 뒤축에 벗겨진 뒤꿈치의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어야 비로소 하이힐 생활자의 걸음걸이가 됐다. 1990년대 후반 이야기다. 여성의 상징이었던 하이힐이 이제 2030세대 여성에게 ‘촌스러운, 혹은 시대착오적 아이템’이 되고 있다. 하이힐의 전성시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팬데믹 속 신발장 구석 신세가 된 하이힐

시대 불문 하이힐은 언제나 여성과 함께했다. 1980년대 팝스타 티나 터너가 청재킷과 미니스커트 차림에 뾰족하고 아찔한 스틸레토힐을 신고 무대를 누비던 기세는 전설로 남았다. 1990년대 힙합 패션 열풍이 불면서 투박한 워커가 등장했으나 하이힐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은 통굽(플랫폼) 구두를 신으며 키높이 효과를 놓치지 않았다. 2000년대에는 하이힐과 통굽을 접목한 일명 가보시힐(뒷굽과 함께 도톰한 앞굽도 있는 하이힐)이 유행했다. 가보시힐은 당시 유행하던 스키니진과 찰떡궁합이었다. 걸그룹 소녀시대가 2009년 발표한 노래 ‘Gee’ 무대의상처럼.

하이힐은 키만 크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다리맵시를 완성하는 체형 보정 역할도 톡톡히 했다. 픽셀 이미지

하이힐은 키만 크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다리맵시를 완성하는 체형 보정 역할도 톡톡히 했다. 픽셀 이미지

트렌드가 바뀌어도 그 형태를 달리할 뿐 하이힐은 스타일링에서 포기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하이힐은 키만 크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다리맵시를 완성하는 체형 보정 역할도 톡톡히 했다. 발꿈치가 쫑긋 세워지면서 종아리가 가늘어지고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위로 올라가 보여 힙업 효과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런 하이힐이 이제는 찬밥 신세가 됐다. 전문가들은 하이힐이 신발장 깊숙이 들어간 결정적인 시점을 2019년 팬데믹으로 보고 있다. 한 패션 전문가는 “‘집콕’이나 재택근무가 1년 넘게 이어지면서 온종일 트레이닝복이나 원마일웨어(실내와 집 근처 1마일(1.6㎞) 반경 내에서 입을 수 있는 편한 옷)를 입다 보니 하이힐을 저절로 멀리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인 NPD그룹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 2분기 동안 하이힐 판매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65% 감소했다. 팬데믹이 종식되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잠시 구두나 화장품 등 ‘꾸밈 용품’ 소비가 늘어난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이힐의 전성기는 돌아올 기미가 없다.

“전염병의 시대를 끝내고 사람들은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에도 웰빙과 실용성을 우선시하게 됐고 하이힐에 다시 ‘올라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죠. 여성들이 고통을 요구하는 제2의 하이힐 적응기를 감내하지 않기로 한 거예요.”

지난해 개봉한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바비>에서 바비월드를 벗어나 현실 세계를 깨달은 바비는 자신의 발이 인위적으로 보이는 아치형이 아닌 평평한 모습으로 바뀐 것을 발견한다. 평범해진 발을 보자 바비는 이렇게 말한다.

“내 발이 이런 모양이라면 절대 하이힐을 신지 않았을 거예요.”

건강상으로 하이힐은 백해무익한 신발이다. 신발 굽이 1인치 높아질 때마다 발에 가해지는 압력은 25% 증가한다. 3인치(약 7.6㎝) 하이힐을 신는다면 발은 평소보다 75% 높은 하중을 감당해야 한다. 앞으로 기울어지는 하체 탓에 상체 균형추는 뒤로 젖혀진다. 발의 변형은 물론 몸의 정렬마저 어긋나 다양한 질병을 유발한다.

MZ세대는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된 미의 기준 대신 ‘나다움’을 중요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하이힐은 그저 불편한 신발일 뿐이다. 픽셀 이미지

MZ세대는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된 미의 기준 대신 ‘나다움’을 중요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하이힐은 그저 불편한 신발일 뿐이다. 픽셀 이미지

내 몸에 편한 것이 좋다…‘나다움’ 시대

2012년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에 등장하는 뉴욕의 펀드 매니저 케이트는 일도 가정도 능란하게 꾸리는 능력자다. 과거 하이힐은 완벽한 여성성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였다. 대중매체에서 묘사하는 성공한 여성은 직업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었다. 고가 브랜드의 아찔한 하이힐은 일하는 여성의 전투화였다. 하지만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구태의연해진 시대다. MZ세대는 획일화된 유행이나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된 미의 기준 대신 ‘나다움’을 중요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일부 여성들에게 하이힐은 자신의 이동성과 편안함을 제한하는 신발일 뿐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이기열 백석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나다운 것, 자연스러운 것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패션”이라며 “하이힐은 물론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는 스키니진 대신 통 넓은 슬랙스 바지가 대세인 것도 ‘나다운 패션’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한다. 패션에는 조화가 중요하다. 백 교수는 편안한 바지에 맞는 신발을 고르다 보니 하이힐이 낄 자리가 없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팬데믹이 종식된 후에도 놈코어룩(노멀+하드코어 조어로 평범함에 초점을 둔 스타일), 고프코어룩(아웃도어 의상을 일상에 접목한 스타일) 같은 일명 ‘꾸안꾸’ 유행이 이어지고 있어요.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패션이 선호되다 보니 하이힐 대신 일상에서도 직장에서도 부담 없이 신는 플랫슈즈, 스니커즈, 로퍼를 찾는 거죠.”

브랜드 중고거래 앱 ‘번개장터’ 데이터로 봐도 하이힐의 거래량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꾸준히 감소세다. 2023년 거래량은 2017년과 비교해 38%로 줄어들었다. 반면 보기에도 편안하고 활동성도 갖춘 여성 와이드 팬츠의 경우 2021년 20만건 수준이던 거래량이 2023년에 30만건으로 늘었다. 2017년과 비교하면 400%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런 흐름에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이 스포츠용품 업체다. 아디다스가 출시한 인도어 축구화 삼바와 가젤 모델은 Z세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인기 있는 핑크 색상 제품은 웃돈을 주고 거래될 정도로 구하기 쉽지 않다. 아디다스는 가젤과 삼바의 2023년 매출이 전년도보다 143%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패션에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유행은 일상뿐 아니라 쇼비즈니스 분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1993년 톱모델 나오미 캠벨이 굽이 40㎝가 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플랫폼 슈즈를 신고 걷다가 런웨이에서 넘어진 적이 있었다. 모델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두고두고 언급되는 패션계의 사건이다. 패션쇼 특성상 모델이 하이힐을 신는 것은 여전히 선호되고 있으나 이전처럼 비정상적으로 높은 하이힐을 신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강해졌다.

화려한 안무로 무장한 K팝 아이돌에게도 하이힐은 필요악이었다. 소녀시대 멤버 유리는 데뷔 10주년 무대를 앞둔 2017년 인대 접합술과 뼛조각 제거 수술을 했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내 몸을 생각하기보다 참았다. 어린 시절부터 하이힐을 신고 춤 연습을 과격하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4세대로 불리는 요즘 K팝 여성 아이돌은 무대에서 굳이 하이힐을 고집하지 않는다. 아이돌 전문 스타일리스트는 “하이힐이 유행이 아닐뿐더러 고난도 동작이 많아진 만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잘 신지 않게 됐다”며 “요즘은 무대용 신발도 안무에 편한 것을 가장 우선시하고 있다”고 변화를 전했다.

“한 번 산 옷은 오래 입자”는 친환경 개념이 자리 잡으면서 패션 아이템 활용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하이힐 유행은 다시 돌아올까? 픽셀 이미지

“한 번 산 옷은 오래 입자”는 친환경 개념이 자리 잡으면서 패션 아이템 활용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하이힐 유행은 다시 돌아올까? 픽셀 이미지

패션을 적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 시대

하이힐 트렌드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보는 분명한 이유는 또 있다. 환경 문제다. 다시입다연구소에 따르면 석유화학 산업 다음으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며 해양 미세플라스틱 발생원 1위 산업이자 세계 폐수 20%를 차지하는 업종이 바로 패션 산업이다. 젊은 세대는 친환경 이슈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패션 유행 사이클이 느려지고 있다는 전문가의 분석이다. 과거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특정 유행이 휘몰아치며 패션 소비를 이끌었지만, 이제는 “한 번 산 옷은 오래 입자”는 경향이 자리 잡으면서 패션 아이템 활용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OOTD(Outfit Of The Day·오늘의 패션) 콘텐츠를 올리고 있는 대학생 전태경씨는 “과거에는 SPA 브랜드(상품 기획부터 제작, 판매까지 일괄 운영해 트렌드에 맞는 제품을 빠르고 저렴하게 선보이는 브랜드) 매장에서 최신 유행을 가늠했다면, 요즘은 SNS로 다른 사람의 스타일링을 참고한다”고 전했다. “‘꾸안꾸룩’이 유행하면서 너무 차려입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어색한 느낌이 든다”는 것도 요즘 세대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유행을 따르는 옷은 오래 입지 못하니 언제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일명 ‘무난(한 아이)템’을 선호하는 것도 대세가 됐다.

팬데믹은 패션의 규칙도 다시 썼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세련된 스타일로 읽히는 시대를 열었다. 하이힐의 시대는 더는 오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그 역시 고정관념’이라고 말한다. 패션은 항상 새롭고 흥미로움을 보여주는 분야다. 디자이너들의 존재감은 ‘안전한 노선’이 아닌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데에서 발휘된다. 앞으로 어떤 패션이 우리를 매료시킬지 쉽게 단정할 수 없다.

패션은 개성이자 도전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진리다. 하이힐이 여성성을 강화하는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의 틀을 깨고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애용하는 이들도 있다. 가수 겸 방송인 조권이 40켤레 하이힐로 젠더 고정관념에 맞서 ‘나다움’을 표출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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