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이 웃으며 건넨 한 마디 묘한 기분이 든다, 왜 한 대 맞은 거 같지?

송윤경 기자

너도 겪고 나도 겪는 직장상사의 ‘수동공격’

상대를 방해하거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방식으로 분노 표현

“아냐, 연희씨한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앞으로 내가 더 신경 쓰도록 할게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김연희씨(31·가명)는 지난달, 오랜 가슴앓이 끝에 직장 상사인 팀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팀장은 싱긋 웃으며 이렇게 세 마디를 했다. 왜 자신을 업무에서 배제하는지, 자신의 일처리에 문제가 있어서인지를 물었지만 이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맥이 풀렸다.

그래픽 성덕환·김병철 기자

그래픽 성덕환·김병철 기자

3~4개월 전부터 팀장은 김씨와 대화를 잘 하지 않았다. 그는 김씨의 담당업무와 관계된 지시마저 다른 동료에게 했다. 그동안 김씨가 참석하던 거래처와의 회의에도 다른 사람을 보냈다. 자신을 ‘패싱’하고 있다는 느낌이 점차 선명해졌다. 면담 이후 팀장의 행동은 아주 조금 달라졌다. 자신을 배제하는 듯 아닌 듯 갈피를 잡기가 더 어려웠다. ‘뭐가 문제지? 내가 너무 토를 달았나?’ 입사 6년차인 김씨는 회의에서 팀장과 다른 의견을 거침없이 제시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외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 화내는지 아닌지 애매하다

“인간의 공격성에 한 가지 미덕이 있다면 그건 모호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3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건강섹션에는 ‘모호한 공격’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때린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오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타임’의 표현대로 공격성엔 “교활한 사촌”이 있다. ‘수동공격’(passive-aggression)이다.

수동공격 행위는 상대를 방해하거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공격하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일부러 상대가 화를 내게 만들어 오히려 자신은 ‘피해자’ 위치에 서기도 한다. 수동공격은 원래 1945년 미국에서 심리학 용어로 탄생했지만 지금은 EBS <생활영어>에서 다룰 정도로 영미문화권에서는 ‘대중의 언어’가 됐다.

직장 상사가 폭언을 퍼붓는다면 부하직원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적어도 ‘원래 저런 사람이니 무시하자’ 정도의 대응 방안이라도 강구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엔 ‘갑질’에 대한 공론이 활발하다. 재벌들이 갑질을 하다가 수사기관 앞의 포토라인에 서는 일도 잦다. 이제 직장에서 ‘폭력적 방식으로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합의는 만들어졌다.

하지만 김연희씨의 팀장처럼 은밀하고 교묘하게 화풀이하는 상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동안 폭언을 일삼는 상사도 잘 견뎌냈던 김씨는 입사 후 처음으로 사표를 고민하고 있다.

30대 중반의 권회선씨(가명)는 업계에서 유명한 벤처기업에서 일했다. 홀로 홍보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와 일대일 대화를 할 때가 많았다. 회사에선 “오늘 정말 멋지십니다”라고 대표의 비위를 맞추는 직원이 대부분이었지만, 권씨는 대표에게 업무와 관련해 솔직한 의견을 말하곤 했다. 직장문화가 수평적인 것으로 알려진 벤처 계열이어서인지 대표는 곧은 조언을 하는 권씨를 존중했다.

하지만 대표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권씨에 대해 “까다롭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회사 내에서 권씨에 대한 평판은 그렇게 굳어지고 말았다. 권씨는 지난해 객관적 지표로 확인 가능한, 월등한 성과를 올렸지만 대표는 연말평가에 반영해주지 않았다. 부드럽지만 완고한 태도로 ‘더 입증하라’고만 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회사를 옮겼다.

칭찬이나 농담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도 있다. 몇 달 전 인사이동으로 부서를 옮긴 김민수씨(37·가명)는 오랜만에 마주친 회사의 간부로부터 “민수씨는 영업부서 가서도 날씬하네”라는 말을 들었다. 김씨는 퇴근 후 간부의 말을 곱씹다가 뜻을 알아차렸다. 영업직은 접대를 하느라 술을 많이 마셔야 하기 때문에 살이 잘 찌는 편이다. ‘남들처럼 과음하며 일하고 있는 것 맞느냐’는 뜻이었다.

마케팅 회사에서 과장급으로 일하고 있는 김경혜씨(37·가명)는 스스로 상사로서 수동공격적인 농담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김씨는 ‘막내’일 때 부서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에 반응하는 등 역할에 충실했지만, 새로 들어온 직원은 그런 감정노동을 하지 않았다. 김씨는 내심 못마땅했다. 어느 날 부하직원이 말끝에 무심코 “제가 막내이다보니까”라고 덧붙이자, 김씨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네가 무슨 막내야, 본인이 막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자기도 모르게 뱉어버린 말을 후회했다. 김씨가 웃을 때 ‘막내직원’은 무표정했다.

■ ‘나는 갑질 상사는 아니다’

사실 수동공격은 권력 위계상 ‘을’에게 주로 나타나는 행동이다. 수동공격이란 단어의 태생이 그렇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정신분석가 콜로넬 윌리엄 메닝거는 상당수 군인들에게서 ‘수동공격적’ 특성을 관찰했다고 미 정부에 보고했다. 그가 가리킨 행동은 뾰로통한 태도로 있거나 고집을 부리고 상사가 시킨 일의 처리를 일부러 지연시키거나 무능한 척하면서 제대로 하지 않는 것 등이었다. 메닝거는 일부 군인들이 이러한 ‘수동적 방법’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수동공격’이란 단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널리 쓰이게 됐다. 겉으로는 분노나 질투, 적개심을 감추고 다른 방법으로 표출하는 행위 자체는 인간관계에서 흔하다. 미국에서는 그런 행위를 가리킬 언어가 생겼고 그러다보니 다양한 사례에 대해 대중도 쉽게 논할 수 있게 됐다. 영미문화권의 매스미디어에서는 ‘수동공격적인 남편 혹은 아내와 사는 법’ ‘수동공격적인 동료나 친구를 대하는 법’ ‘수동공격적인 사람은 이런 말을 많이 한다’와 같은 콘텐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낮은 강도의 수동공격엔 ‘순기능’도 있다.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업무를 지시할 때 당신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자기 생각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받아들인 다음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며 미루거나 대강 처리해버릴 때도 있을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차라리 이런 대응이 자신을 덜 소진시킨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잦으면 상사는 당연히 화가 난다. 업무능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없다. <수동공격 극복하기(Overcoming Passive Aggression)>(한국에선 <“나 화났어”라고 말해라>라는 제목으로 2008년 출간)라는 책엔 상사가 지시한 프로젝트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남성이 등장한다. “기한이 언제까지란 말씀 안 하셨잖아요. 게다가 전 다른 일도 마무리해야 했어요.” 이렇게 항변한 남성은 내심 무능력한 상사에게 복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승진하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라.” 수동공격적인 직원은 결국 그만큼의 불이익을 받는다.

그런데 ‘리더’가 수동공격적이면 문제의 차원이 달라진다. 업무와 조직문화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버드 비즈니스리뷰’는 올해 1월 ‘수동공격적인 상사를 대하는 법’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리더의 수동공격은 대개 이렇다. 업무에 필요한 정보에 쉽게 접근하기 어렵게 하거나, 지나치게 직원을 통제하려 한다. 또는 특정 직원을 다른 직원과 일부러 경쟁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에게 실망한 직원에게 오히려 차갑게 대한다. 때로는 결단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끌기도 한다. 이런 리더가 있으면 직원들 간에 ‘직장 내 괴롭힘’이 생기고 업무 만족도가 떨어진다.

미국의 경제웹진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묘사한 사례는 더 구체적이다. 2016년 8월 이 매체가 실은 ‘당신의 상사가 수동공격적임을 보여주는 징후 11가지’를 보면, ‘적개심에 가까운 유머’는 수동공격적 리더들이 자주 활용하는 수단이다. 모욕적인 농담을 한 후 상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농담이야.”

수동공격적 상사는 또 직원에게 피드백을 줘야 할 시점에 중언부언하기 일쑤다. 이럴 경우 직원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은 받지만, 상사와 직접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가 없다.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를 줘 마감에 실패하도록 만든다든가, 오래전에 했던 직원의 실수를 계속 거론한다든가, 힌트만 던져주고 정확한 지시는 내리지 않고, 복잡하고 의미 없는 규칙의 엄수를 강조하는 것 등이 모두 수동공격적 리더들이 자주 하는 행동이다.

■ 상대의 무기력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

왜 은밀한 방법으로 부하직원을 열받게 하는 직장 상사가 생기는 것일까. 이유는 다양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어린 시절부터 ‘화’를 건강하게 표출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을 수 있다. 미국에서 심리치료를 하고 있는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는 “아동기에 능동적으로 화를 냈을 때 처벌을 받았거나 좋지 않은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이 주로 수동공격적인 행동을 한다”며 “수동공격을 가했을 때 상대의 무기력을 보면서 자신의 힘을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고, 자신이 상대를 컨트롤한다는 우월감을 갖게 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혹은 부하직원이 먼저 상사를 분노하게 만든 데 대한 복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를 드러내고 논의하기보다 수동공격적인 방식을 택한다는 건 그만큼 심리적인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 내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갑질’을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행동일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최근 갑질 논란이 거세지고 있으니, 그런 문제에 걸리지 않기 위해 돌려서 공격성을 펼치려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선 ‘리더’ 개인이 아니라 기업의 문화 자체가 수동공격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영미문화 전공자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수동공격은 한국말로 하면 한마디로 ‘왕따’”라면서 “서양에서는 상대의 문제를 조리 있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집단주의가 강한 한국 기업에서는 (무엇이 문제라고 설명해주는 대신) 그냥 따돌리는 문화가 만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렵게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퇴사를 결심하는 젊은 세대가 대개 그런 상황을 겪고 나온다”고 덧붙였다.

은밀한 방법으로 적개심을 발산하고 있는 상사나 동료, 부하직원은 상대를 지치게 한다. 이들은 심리치료가 필요한 사람일까. 아닐 수도 있다. 윤 교수는 “수동공격 행동과 병적인 증상으로서의 수동공격성은 따로 봐야 한다”면서 “일단 스스로 수동공격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 사람은 별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성격장애 수준으로 보려면 (수동공격을 계속하면서도) 스스로 죄책감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 심각한 수동공격성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 차원에서 격발된다.

올 상반기의 ‘미투(#MeToo)’ 운동으로 성차별·성폭력을 향한 여성들의 분노가 분출되면서 남성 우위의 직장 분위기는 조금씩이나마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성차별·성희롱 없이 여성과 일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신 ‘펜스룰’을 거론하며 여성 직원과 무조건 거리를 두려는 남성 상사들도 나타났다. 갑질에 대한 사회적 분노 역시 직장 내 권위주의적 질서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있지만, 수평적 소통구조를 갈구하는 흐름 앞에서 수동공격적 대응을 하는 상사들도 있다. 문제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대신 겉으로는 웃으며 은밀하게 괴롭히고 길들이려는 태도는 상대의 마음을 멍들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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