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째 ‘제로 웨이스트’ 중…“게임하듯 가볍게,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조해람 기자
지난 25일 장보기를 마친 작가 소일(김가영). 조해람 기자

지난 25일 장보기를 마친 작가 소일(김가영). 조해람 기자

“앗, 비닐 말고 여기에 담아주세요!”

사과를 비닐 봉투에 담아주려는 과일가게 주인에게 손님이 급하게 외친다. 검은 비닐 봉투가 꿰인 뭉치로 향하던 주인의 손이 멈춘다. 손님이 펴든 것은 초록색 그물망 바구니. 주인은 그물망 바구니에 과일을 담고, 귤 서너 개를 덤으로 얹어주면서 “재생 비닐을 들일까 했는데 여의치 않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손님은 바구니를 어깨에 매고 웃으며 가게를 나섰다. 서너집 건너 있는 김밥집에서는 샐러드 김밥 한 줄도 포장했다. 양철 도시락통에 김밥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날 바다엔 500년 동안 떠다녔을지도 모를 비닐 봉투 한 장, 1회용 포장 용기 한 개가 덜 버려졌다.

지난 25일 작가 소일이 경기 수원의 한 김밥가게에서 양철 도시락통에 담긴 김밥을 건네받고 있다. 조해람 기자

지난 25일 작가 소일이 경기 수원의 한 김밥가게에서 양철 도시락통에 담긴 김밥을 건네받고 있다. 조해람 기자

과일가게에서도 그물망 장바구니를 이용했다. 조해람 기자

과일가게에서도 그물망 장바구니를 이용했다. 조해람 기자

초록색 그물망 바구니의 주인공은 5년째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고 있는 작가 소일(본명 김가영)이다. 그는 2016년부터 블로그에 제로 웨이스트 일기를 써 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제로 웨이스트는 처음인데요>를 펴냈다. 제로 웨이스트의 비결을 묻자 소일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제로 웨이스트 고수’ 소일을 지난 25일 그의 일터인 경기 수원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 만났다.

■쉽지 않았던 시작, 하나씩 천천히…

제로 웨이스트의 시작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당시 소일은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교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피난 키트’를 꾸리는 것을 보면서 물건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내가 챙겨야할 피난 꾸러미는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와 보니 다 쓰레기고 짐이었어요.” 한국에 돌아와 2016년 경주 지진을 보고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제로 웨이스트를 시작했다. 단순한 미니멀리스트를 넘어 환경과 사회에 책임감을 갖겠다는 다짐을 담아 블로그에 ‘윤리적 환경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5년차 제로 웨이스터’ 작가 소일이 경기 수원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해람 기자

‘5년차 제로 웨이스터’ 작가 소일이 경기 수원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해람 기자

처음엔 집에 있는 일회용품의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했다.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을 기록하고 조금씩 줄여나갔다. 실수도 많았다. 일회용 포크를 빼 달라는 주문을 잊기도 하고, 다회용기를 챙겼는데 일회용품을 쓰게 되는 경우도 잦았다. 소일은 “(시장에서)장바구니나 다회용기에 담아달라면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빠서 안 된다거나, 흙이 묻어 있는 것은 가방이 망가진다고 하기도 했다”며 “장바구니를 내밀기도 전에 비닐에 담아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실수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즐기는 태도’ 덕이었다. 소일은 “내가 얼만큼 쓰레기를 만들었는지 계속 떠올리며 좌절하기보단, 쓰레기를 안 만드는 방법을 찾아가면서 혼자서 게임하듯이 했다”고 말했다. 실수를 기록해 가며 조금씩 제로 웨이스트 ‘단계’를 높여 갔다.

플라스틱 대체 방법은 동네 할머니들을 보며 힌트를 얻었다. “플라스틱이 많지 않았을 땐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아크릴 수세미가 나오기 전엔 어떻게 설거지를 했을지 생각하다가 수세미를 기른 것처럼요.”

작가 소일이 일하는  경기 수원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실에 있는 천연 수세미.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일하는 경기 수원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실에 있는 천연 수세미. 조해람 기자

■매달 나오던 위생용품 쓰레기가 사라졌다

1회용품을 거절하면서 ‘소비’ 자체를 줄였다. 직접 만든 DIY 소품이 그의 일상을 채워나갔다. 안 입는 민소매 옷은 에코백이, 남는 천은 손수건이 됐다. 다회용 수저, 고체 치약처럼 1회용품을 대체할 수 있는 소품들도 쓰고 있다. 소일은 “간혹 제로 웨이스트를 위해 키트를 사려는 분들이 계신데, 제로 웨이스트가 구매욕으로 이어지는 건 조심해야 한다”며 “있는 물건을 그대로 쓰는 게 제로 웨이스트의 관점에서는 더 좋다”고 했다.

특히 매달 월경 때마다 플라스틱을 아끼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한다. 다회용 월경컵과 면 생리대 등을 이용하면서 일회용 생리대를 버리지 않게 됐다. 통상 일회용 생리대 1개에는 비닐 봉투 4개 분량의 플라스틱이 들어간다. “화장실 쓰레기통이 찰 일이 없더라고요. (일회용 생리대는) 지금까지 버렸던 쓰레기 중 제일 많았고 피할 수 없는 쓰레기였는데 그걸 줄였으니까요. 냄새도 나고 눈에도 띄니 싫었는데 그게 없어서 좋네요.” 소일은 제로 웨이스트 이전에 비해 쓰레기가 90% 정도 줄었고, 그 가운데 플라스틱의 비중이 크다고 했다.

다용도로 사용하는 손수건. 닦는 것은 물론, 작은 물건을 포장하거나 머리를 묶을 때도 손수건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조해람 기자

다용도로 사용하는 손수건. 닦는 것은 물론, 작은 물건을 포장하거나 머리를 묶을 때도 손수건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조해람 기자

최근에는 사람들의 높아진 인식을 실감하는 때도 있다. 장을 볼 때 다회용기를 들고 가면 비닐값을 깎아 주는 상인들을 종종 만난다. 소일은 “예전에는 불편해하고 귀찮아하는 분이 많았는데, 요즘은 이런 게(제로 웨이스트) 필요하다고 공감해주는 분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가족과 회사 동료들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 조금씩 쓰레기를 줄여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보람이다. 책을 낸 뒤로는 독자들이 올린 리뷰에서 ‘몇 년 전부터 블로그를 보며 따라 하고 있었다’는 말을 발견할 때 뿌듯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바꿀 수 있다면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 5년째 제로 웨이스트를 이어 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실수가 생겨도 ‘실수가 있었네, 내일 잘 챙기자’고 생각하는데, 그게 지속 가능할 수 있는 비결이죠.” 그는 자신도 ‘완벽’하지는 않다고 귀띔한다. 다회용품을 챙기는 걸 잊어버리기도 하고,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물건들도 있다. 그래도 그는 제로 웨이스트를 포기하지 않는다. “저는 ‘순수’를 다그치지 않아요.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제로 웨이스트를 하다 보면 실패하고 싶지 않은데도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실패에 상처받지 않고 방법을 찾는게 더 낫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게 제일 좋아요.” 그는 ‘꾸준함’에 힘이 있다고 믿는다. 완벽하지 못해도 꾸준히 하면 습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 소일이 평소 가지고 다니는 ‘제로 웨이스트’ 관련 물건들.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평소 가지고 다니는 ‘제로 웨이스트’ 관련 물건들. 조해람 기자

그에게 제로 웨이스트는 ‘쓰레기를 줄이는 것’ 이상의 의미다. 불필요한 물건들을 덜어내며 그는 과잉 생산·과잉 소비로 지탱돼 온 경제 시스템이 과연 옳은 길일지 고민한다. 소일은 “우리는 그동안 빨리빨리 생산하고 성장하도록 강요받아 왔다. 그게 정말 괜찮을까”라며 “많이 생산할수록 좋다는 ‘다다익선’ 시대는 결국 끝이 난다고 본다. 지속 가능하려면 소모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불평등 문제도 걸려 있다. “취약계층은 기후위기나 쓰레기 같은 환경 문제에 더 취약해요. 좋은 환경에서 살며 많은 탄소를 배출한 사람들이 아니라, 탄소를 배출하지 않았던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거든요.” 지금까지 우리가 물건을 생산하는 ‘양’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이 물건으로 인해 소외되거나 피해를 입는 이들이 없는지 돌아보자는 게 그의 제안이다.

개인의 실천으로 플라스틱을 줄일 수 있을까. 소일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2014년 APEC 회의 때 중국이 공장을 멈추자 파란 하늘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개인의 실천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제로 웨이스트를 저만큼 하지 않더라도, 각자 10%씩만 쓰레기를 줄여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작은 실천의 힘을 믿는 그는 책에도 “작은 실천들이 모이면 분명히 변화는 찾아온다. 세계를 바꾸기 힘들지만 나는 바꿀 수 있다”라고 적었다. 그 문장을 쓴 마음을 물었다.

“내가 무거운 텀블러를 등에 지는 게 오히려 내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라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세계를 당장 바꿀 힘은 없지만 나 자신은 바꿀 수 있잖아요? 나를 바꾸면 내 세계가 바뀌고, 그게 세계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은색 텀블러가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5년차 제로 웨이스터’ 작가 소일이 경기 수원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해람 기자

‘5년차 제로 웨이스터’ 작가 소일이 경기 수원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해람 기자

■제로 웨이스트 5년 함께한 물건들

작가 소일이 사용하는 식기들. 숟가락과 젓가락은 접이식으로 휴대하기 편하다. 숟가락 주머니는 집에 있는 소창(목화솜으로 만든 천연 섬유) 천이고, 젓가락 주머니는 셔츠를 제활용한 제품이다. 대나무 칫솔과 고체 치약으로 양치를 한다.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사용하는 식기들. 숟가락과 젓가락은 접이식으로 휴대하기 편하다. 숟가락 주머니는 집에 있는 소창(목화솜으로 만든 천연 섬유) 천이고, 젓가락 주머니는 셔츠를 제활용한 제품이다. 대나무 칫솔과 고체 치약으로 양치를 한다.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사용하는 가방. 버려진 지하철 광고판을 재활용한 제품이다.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사용하는 가방. 버려진 지하철 광고판을 재활용한 제품이다.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직접 만든 에코백. 입지 않는 민소매 상의를 활용했다.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직접 만든 에코백. 입지 않는 민소매 상의를 활용했다. 조해람 기자


버려진 지하철 광고판을 재활용한 명함지갑. 조해람 기자

버려진 지하철 광고판을 재활용한 명함지갑.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사용하는 텀블러와 텀블러 캐리어, 망 바구니. 조해람 기자

작가 소일이 사용하는 텀블러와 텀블러 캐리어, 망 바구니. 조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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